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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국회] 노타이와 정장차림의 '거꾸로 보이는 유시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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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레퓌스 사건

딸아이가 전교조였던 담임의 권유로, 유시민의 '꺼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고 있었다. 1991년 중3겨울방학 때였다.

글 자체는 인간적인 글이었으나,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감성이 강한 중고등학생이 읽기에는 너무 자극적인 글로 사고의 편협을 조장할 수 있어, 권할만한 책은 아니었다.

세계사는 역사를 보는 바르고 큰 시각을 길러야 하는 분야인데, 아주 조그만 사건을 크게 부각해서 보여주거나, 불평등한 사회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소위 인권이나 사회주의에 너무 치우친 책이었다. 소위 의식화를 위해 왜곡한 책이었다.

그 중 한장인, 모택동의 대장정은, 모택동을 유방에, 장개석을 항우에 비교하면서, 모택동 통치시대의 대 약진운동과 홍위병에 의한 문화대혁명에서 살해되거나 굶어죽은 7000만 인민에 대한 언급이나 비판이 전혀없는 왜곡된 서술이었다.

책의 첫장은 드레퓌스 사건이다.

그의 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890년대 말 프랑스 정보부가 주불 독일 대사관에서 훔친 불란서 군의 기밀유출 사건의 주범으로유태계 불란서 장교 드레퓌스가 지목되어, 진술 기회조차 없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 후, 실제 스파이는 다른 동료 장교로 판명되였으나, 이미 판결난 사건으로 군 사령부에서는 무조건 사건을 덮으려고만 했는데, 주변의 끈질긴 구명운동에, 대 문호 에밀 졸라가 가세함으로써 여론이 조성되고, 실제 스파이가 영국으로 망명해서 자신이 이중스파이였음을 고백하여 드레퓌스의 무죄가 증명된다.

재심판결은 정상참작의 감형과 특별사면이었다.

그 몇년후 드레퓌스의 재심요구로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었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불란서 사회의 반 유태운동과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국제적인 인권운동으로 불란서정국이 시끄러웠다.

이 사건은 두 개의 대립되는 세계관의 대결이었다.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얼마던지 무시될 수 있다는 군국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기타 기득권 세력이 한편이고 ,

자유, 평등, 우애라는 공화 정신 위에서만 국가의 번영과 안전이 있을 수 있다는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 어떤 형태의 차별이나 불평등도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다른 편이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세계관은 인간을 국가의 주인이 아닌 종속물로 보는 반동적 세계관이다.

그 반대는 진보된 세계관이다. 진보적 세계관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성공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중 하나이다.

이런 유시민의 세계관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회에서 인간을 주인으로 보던, 종속물로 보던 이는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이고, 대를 위해서 소가 희생되는 것은 현실사회에서 비일비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사회의 상황과 풍습에 따라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자살테러도 일종의 종교적 세뇌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옳고 그름은 당하는 쪽이나 테러를 가하는 쪽이나, 자기 관점으로 해석할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드레퓌스사건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쓴 이유는 이 사건이, 유시민이 관여된 서울대 프락치사건과 어떻게 유사한 지와 유시민이 설명한 드레퓌스의 입장과 유시민이 행한 프락치사건에서의 유시민의 입장이 대조돼어서이다.

유시민은 프락치 사건 항소문에서, 당시 서울대학생들의 학교내에 산재해 있는 무수한 프락치들에게 얼마나 심리적 불신감을 받고 있었나와, 가짜 대학생이 프락치였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린치를 가한 것은 잘못됐다. 내가 말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지만 실제로 나는 절대 린치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항소문에 기재하고 있다.

아마도 사실대로 기술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최근에 유시민의 이에 대해 사과는 그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내가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지만, 가담한 서울대생들을 대신해서 사과한다.'

서울대 학생본부에서 행해진 불특정 다수의 집단폭행이, 당시 복학생 협의회 회장이던 유시민이

직접 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볼 사람들의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그렇게 매도하는 보수주의자, 기득권세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프락치사건의 린치가 어떻게 다른지?

그는 집단폭행을 한 불특정 다수의 대표일 수밖에 없다.

그의 사과는

'내가 직접 린치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대표중의 한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당시 가담자들을 대표하여 사과합니다.' 로 바꿔야 옳은 표현이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불법감금과 진술기회 없음을 그렇게 매도했던 유시민이 당시 프락치로 오인받은 피해자들의 아니라는 해명을 들을 생각도 않하고 자백할 때까지 계속 고문을 해 댔다는 것은 얼마나한 큰 아이러니인가? 다른 애들이 했지 난 아니라는 말이 얼마나 비겁한 말인지는 드레퓌스에서 그가 설명한 기득권자들에 대한 매도에 잘 표현돼 있다.

2, 자기가 먹는 우물에 침을 뱉지말아!

러시아 속담이다.

유시민이 국회의원 선서식에 노타이로 나와서, 항의하는 동료의원들을 예의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띄고 오만하게 내려다 본 테레비젼 화면을 시민들은 보았을 것이다.

혹 자는 통쾌하게, 혹 자는 오만한 자로 각기 느낌은 달랐겠지만, 나름의 고집이나 주관이 있어 매도당할 정도의 행동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청문회에서의 정장차림은 의미가 달랐다. 정중한 말투와 단정한 머리도 해석에 따라서는 '나는 교활한 자요!' 를 스스로 자백하는 형상이었다.

나와 무관하면 얼마던지 상대를 조소할 수도 있고 무시하다가도, 내가 아쉽거나, 상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표변하여 더 할 나위없이 정중한 것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

그를 어떻게 믿어야 옳을까?

3.禮義廉恥 (예의염치)

춘추시대 제나라의 관중(BC650년)은 나라를 다스리는 네가지 기본 강령으로 예의염치를 들고, 이중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고, 둘이 없으면 나라가 위험해 지고, 셋이 없으면 나라가 넘어지고, 넷이 다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사람의 지혜는 일어난 일은 볼 수 있으나 장차 일어날 일은 볼 수가 없다.

예란 장차 일어날 일을 일어나기 전에 금하는 것이고 법이란 일어난 후에 금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쓰임은 쉽게 알 수 있으나, 예의 쓰임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란 취하고 버릴 것을 미리미리 챙기는 것이다.

천하의 마음은 큰 그릇과 같아서 천자가 두기에 달려있다.

예의가 법령보다 못하고, 교화가 형벌보다 못하다면 나라가 오래갈 수 없는 것이다.

이천여년전 사람이 이미 통찰한 삶의 기본이, 사학법 개정, 황우석 사태, 유시민 장관후보자 공청회 등의 혼란스런 세태에 새삼 다가오는 것은 내가 늙은 이라서일까?
[디지털국회 김창국]

(이 글은 인터넷 중앙일보에 게시된 회원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중앙일보의 논조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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