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하우스 일 도우며 여행? 제주서 ‘낭만 착취’ 당한 청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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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김모(26)씨는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낭만적인 여름방학을 기대했다. 제주도에서의 휴식과 돈벌이가 가능한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제주시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staff)’로 일하기로 했다. 스태프는 정식 직원이 아니지만 일을 돕는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는 장기투숙객을 말한다. 김씨도 게스트하우스 일을 돕고 남는 시간에 여유롭게 제주도를 여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휴식은커녕 마음의 상처만 입고 1주일 만에 상경했다.

청소·빨래 등 하고 숙식 제공받는 #정식 직원 아닌 장기투숙 ‘스태프’ #방학 때 돈 벌며 휴식 꿈꿨지만 #무급으로 종일 일 시키는 업주도 #“명백한 노동, 근로기준법 위반”

김씨는 오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다른 스태프 2명과 함께 청소, 빨래, 손님 응대, 저녁 파티 준비 등을 했다. 숙식은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함께 지내는 아파트에서 했다. 일당은 1만원, 자유시간은 하루 4시간이었고 이틀 일하면 이틀은 쉴 수 있었다. 꿈과 현실의 차이는 사장의 태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씨는 “사장은 마치 나를 정식 고용한 것처럼 일을 시켰다. 당직을 서게 했고,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라버리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태프 문화는 제주 올레길이 본격 개방된 2007년 이후 게스트하우스가 급증하면서 서서히 형성됐다. 손님은 일하는 틈틈이 여행을 하고 주인은 일손을 더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였다. 낭만적인 스태프의 전형은 최근 인기를 모으는 JTBC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가수 아이유의 역할과 비슷하다. 일을 하면서도 사장 내외, 투숙객들과 정을 나누고 제주도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청년들의 환상을 깨는 사장들의 ‘갑질’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최저시급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을 받거나 무급으로 일하면서도 노동 착취를 당하기도 한다.

월 15만원을 받고 스태프 일을 했던 송모(22·여)씨는 “저녁마다 열리는 파티 준비를 끝내면 보통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곤 한다. 그게 싫어서 다른 곳에 따로 앉아 있기라도 하면 같이 어울리라고 권유해 불편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무급 스태프를 한 박모(24·여)씨도 “사장은 쉬고 싶을 때 쉬라고 했지만 진짜 쉰 날은 한 달에 딱 6일뿐이었다. 처음 내려갈 때 했던 생각과 너무 달랐다. 누군가 스태프를 하겠다고 하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노동 전문가들은 사장과 스태프 간의 고용관계는 정(情)에 의존한 비정상적인 계약이라고 지적했다. 최한솔 노무사는 “일부 업주의 횡포는 제주도 생활의 낭만을 악용하는 ‘낭만 착취’다. 일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교묘히 이용해 근로기준법을 비켜 가려는 것이다.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있다면 엄연한 노동행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원 여행소비자 권익증진센터에 따르면 제주도 내 게스트하우스 대부분은 농어촌 민박으로 신고·운영 중이다. 신고된 농어촌 민박 업체는 2015년 기준 2357개다. 미신고 영업도 많아서 불이익을 당한 스태프가 법적인 보호를 받기는 쉽지 않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들도 애로사항은 있다. 한 업주는 “통상의 숙박업과 달리 인간적인 관계와 그런 편안함을 바탕으로 스태프와 일하는데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금방 떠나버려서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제주시 농정과 관계자는 “일손이 부족할 때 상시로 스태프를 모집하기 때문에 일일이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고 말했다. 광주지방고용노동청 제주근로개선지도센터 관계자는 “제주지역 숙박업종의 근로개선 신고가 해마다 늘고 있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들의 고용 문제도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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