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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기자의생생무대] 세 처녀의 뒷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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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주 '쇼틱'이란 회사의 개업식이 있었다. 쇼틱은 작가.연출가 등 창작자 그룹과 제작자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이른바 '공연 중개업'을 표방한 회사. 공연계의 거물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2층짜리 단독 주택을 개조한 사무실인 덕분에 개업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삼삼오오 각 방으로 흩어져 오붓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1층 부엌 옆 골방에 몇 명의 여성 창작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술도 몇 순배 돌았겠다, 만날 혼자 작업하다 오랜만의 동지애에 의기투합해선지 모두들 속내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역시 최고의 안주거리는 뒷담화(?) 아니겠는가. 화살은 몽땅 제작자를 향했다.

"나도 품격 있는 문화 예술인으로 살고 싶어. 근데 왜 자꾸 이 바닥이 나를 악다구니 쓰는 아줌마로 만드는지 모르겠어."

번역가 성수정(39)씨가 말문을 텄다. "지난해 가을 모 제작자가 영국 작품 하고 싶다고 번역해 달래. 해 주었지. 두 달 기를 쓰고 해서. 뭔 놈의 고어(古語)가 그렇게 많은지 죽겠더라고. 근데 실컷 번역해서 넘겼더니 그 작품 안 한대. 그래서 돈 못 주겠다는 거야." 그녀는 영어 신문 기자를 했고, 동시통역사 자격증도 갖고 있으며, 대학에 강의를 나가기도 한다. 엘리트 중 엘리트인 셈. 그래도 연극이 좋다며 이 바닥을 못 떠나고 있다. "우리 연봉이 사실 500만원도 안 되잖아. 한 작품 맡으면 번역하고, 각색에 참여하고, 연습할 때 나가고… 6개월 족히 걸린다고. 그렇게 죽도록 고생했는데 200만원 주겠다던 번역료를 100만원으로 깎겠다니…. 어려운 소규모 제작사라면 이해라도 해. 연극판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A.D.M 등 메이저 기획사가 그 짓거리를 해요…나, 원 참."

바통을 이어 받은 건 신예 작곡가 K(25). "얼마 전에 모 제작자로부터 전화가 왔어. 그 사람이'하루 만에 곡 쓴다며. 이번에 창작곡 하나 필요하니깐 내일까지 써와'라더라. 내가 무슨 기계야. 그래도 밤 꼬박 새서 곡 썼어. 다음날 가지고 갔더니 책상에 두고 가래. 딴 사람이 써온 거랑 비교한다며. 일주일 뒤에 전화 왔어. 내 걸로 하겠데. 근데 곡 하나에 돈 주기는 좀 그렇고, 밥을 사시겠다는 거야. 나가서 뭐 먹은 줄 알아? 4000원짜리 잔치 국수야. 그것도 지갑 안 가지고 왔다고 해서 결국 내가 냈잖아."

조용히 듣고 있던 '왕언니' 오은희(42)작가가 나섰다. "야, 그래도 너희는 외국물 먹고 그러잖아. 난 지난달 뮤지컬 '겨울연가' 때문에 일본 간 게 생전 처음 비행기 탄 거라고." 왕언니는 몇 가지 조언도 했다. "제작자가 가장 많이 써먹는 방법이 뭔 줄 알아? '예술가가 왜 그렇게 돈을 밝히세요?''아니 경력 10년차도 200만원 받는데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이런 얘기 꼭 나온다니깐."

처녀들의 수다는 후딱 밤 12시를 넘겼다. 탄식도 많았고, '두고 봐'란 호기도 넘쳤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 옆방에 있던 제작자 J씨가 방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왔다. "아니 여기들 다 계시네. 참, 이번에 근사한 뮤지컬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세 처녀의 눈이 동시에 초롱초롱 빛났다. "뭔데요?"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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