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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천국의 경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42호 31면

성석제소설

혼자 일본을 여행하던 J, 단체여행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일본 산간 지방의 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화려한 문명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인근의 산에서 나는 풍부한 임산물·농산물이며 계곡과 호수의 수산물로 자족적인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교육은 홈스쿨링 위주였고 공산품 의류보다는 직물을 사다가 만들고 천연 염색한 옷을 주로 입었다. 오래된 책과 낡은 라디오가 그곳에서는 여전히 인기 있는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했다. 물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없었다.

안온해보이는 일본의 산간 마을 #흥분도, 목표도 없이 사는 주민들 #생계비 뺀 나머지는 생명보험료 내 #10여개 생보사 간판보며 세상 이해

J는 몇년 만에 그곳을 방문하는 외국인으로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이 집 저 집 돌아가며 묵고 딴 데서는 먹기 힘든 전통음식을 맛보며 며칠을 잘 지냈다. 전 세계 50여개국을 다녀본 그로서도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 호의와 평안함을 누렸다. 집은 오래되었지만 깨끗했고 손때가 묻은 가구, 집기에서는 세월의 향기마저 느껴졌다.

인스턴트 음식을 파는 곳, 편의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학조미료 같은 맛이 나는 풍경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고 일상은 느리고 느긋하게 흘러갔다. 밤에는 조도가 낮은 가로등, 일찍 잠 드는 사람들 덕분에 어둠이 꿀처럼 짙었고 나무 꼭대기 위 하늘에는 도심의 불빛같이 황홀한 별빛이 빛났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여행으로 지쳐 있던 그는 그 마을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아예 한두 달쯤 있어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풍토병처럼 퍼져 있는 오래된 권태와 우울을 발견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자극 체감의 법칙 때문일까. 수십년 동안 함께 어울려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며 살아온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다. 좁은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흥미로울 것도 없고 굴곡도 없으며 낙차도 없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심심해 죽을 지경의 상황에서 출구도 해결책도 없는 채 그냥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을 공동체가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기반시설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홍수와 태풍, 지진은 그 마을에서는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새롭고 신나는 일은 기대할 수 없고 그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할 새로운 지향점, 목표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살아도 문제될 게 전혀 없으니 모험할 이유가 없었다. 매일이 다른 날과 같고 한 해는 다른 해와 다를 게 별로 없었다. 오늘 본 얼굴은 한달 전에 본 얼굴과 표정과 주름이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일종의 집단 무기력증에 빠진 채로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그 마을을 어쩌다 스쳐가는 여행자들은 마을에 대해 감탄을 거듭하고 상찬에 입이 말랐지만 며칠 머물렀다 가고나면 다시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대도시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짐 싸들고 마을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은 전혀 없었다.

닷새쯤 그 마을에 머물던 J는 마침내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약간이라도 낯이 익은 몇몇 마을 사람과 떠나기 전날 조촐한 석별 파티를 열었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50대 중반 K의 정원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집에서 먹고 마실 것을 가지고 왔다. 반딧불이를 닮은 빛깔의 태양광 가로등이 뜰 여기저기 켜졌고 배경음악처럼 나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밤새의 울음소리가 났다. 갑자기 J는 묻고 싶어졌다.

“저 여기 와서 이때까지 쭉 궁금한 게 있었는데, 가는 마당이고 하니 실례를 무릅쓰고 여쭤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K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J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서 고랭지 농법으로 농사도 짓고 버섯·산채도 채취해서 팔고 가재도 잡고 해서 소득을 올리셨다는데 저는 그런 걸 본 적이 없어서요.”

K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농산물은 시설에서 자동화된 과정으로 생산되고 있어서 밖에서는 잘 알 수가 없지요. 눈으로는 안 보여도 해야 할 건 다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도 별로 느낄 수 없고 전부 다 중산층 같아서 그것도 왜 그런지 궁금해요.”

“그렇지는 않아요. 분명히 대대로 마을의 대표를 지내온 가문도 있고 소작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도 있으니까. 부자들이 표시를 안 내고 과시를 안 하기는 해요. 여기서는 돈 많다고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펑펑 쓸 일이 없으니까.”

“부자가 안 쓰는 건 알겠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생계를 꾸려가나요?”

“느끼셨겠지만 일상생활에 돈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아요. 그래도 다음 세대를 위해 대책을 세우기는 합니다...”

말끝을 흐리는 K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생명보험사 간판이었다.

“아, 정말 저는 왜 저런 게 이 마을에 그렇게 많은가 했습니다.”

K는 주변을 둘러보며 짐작하기 힘든 의미의 웃음을 지었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 목숨이 가장 소중하고 값비싼 자산인 거죠.”

알고 보니 그 마을의 사람들은 일본인의 평균 생명보험 가입 건수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보험 상품에 가입해 놓고 있었다. 그들의 수입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외에는 대부분 생명보험의 보험료를 불입하는 데 들어갔다. 불의의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생기면 보험사에서 지급되는 보험금을 가지고 살면서 그 다음에 보험금을 탈 후세를 위해 열심히 보험료를 부었다. 그 마을의 경제가 꾸려져가는 비결은 생명보험이었다.

J는 다음날 아침 각기 다른 생명보험 회사의 간판을 세어보며 마을을 빠져나왔다. 열 개가 넘었다. 밖에서 보는 마을은 여전히 평화롭고 안온하고 깨끗해 보였다.

그 뒤로 시골 마을에 갈 때마다 생명보험 회사의 간판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고 J는 말했다. 어떤 장소에 뭔가 많이 있는 이유를 알면 훨씬 더 깊이 세상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도.

※‘성석제 소설’은 성석제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험적 칼럼으로 4주마다 연재됩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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