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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 밀어붙인 정권, 하나같이 역풍 직면…부시·대처는 감세 덕 봤다가 증세로 퇴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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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호 07면

세금과 선거의 정치학

1846년 너새니얼 커리어가 보스턴 차 사건을 묘사한 석판화. 1773년 영국 정부의 과세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 사건은 이후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1846년 너새니얼 커리어가 보스턴 차 사건을 묘사한 석판화. 1773년 영국 정부의 과세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 사건은 이후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세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의 존립과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해 왔다. 국왕이든 영주든 세금을 제대로 거둬야 정권을 유지하고 전쟁도 치를 수 있었다.

예부터 과도한 징수로 몰락 자초 #일본도 소비세 인상 수차례 미뤄 #캐나다 보수당, 부가세 논란에 전멸 #올랑드 佛 대통령은 재선도 포기 #국내서도 종부세·깃털론 사면초가

세금을 내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세금이 반가울 리 없다. 과도한 징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을 증폭시키며 정권의 몰락을 부르기도 했다. “세금이 호랑이보다 무섭다”거나 가렴주구(苛斂誅求)·혈세(血稅)라는 말이 회자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중세 영국의 로빈 후드 이야기는 세금 징수의 약탈적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근대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주요 사건들의 배경에도 어김없이 세금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루이 16세의 가혹한 징수가 도화선이 됐고,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 정부의 차세(Tea Act) 제정에 대한 반발이 주원인이었다. 이는 미국 독립전쟁의 단초가 됐고 이때 나온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세금은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집권당의 진퇴를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해 왔다.

英 노동당, 증세 이미지에 18년 야당 설움

의회민주주의가 시작된 영국에서 의회정치의 발전은 세금과 궤를 같이해 왔다.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의 시발점 중 하나도 세금 갈등이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세금 징수를 포함한 국왕의 통치 행위는 법률과 의회 동의하에서만 가능하도록 하는 입헌군주제 전통이 확립돼 나갔다.

현대 영국 정치에서 세금이 핵심 이슈로 등장한 것은 1979년 마거릿 대처 총리가 집권하면서다. 총선 당시 대처 총리는 감세를 약속한 반면 노동당은 부유세 도입을 공약해 대조를 이뤘다. 이 선거를 계기로 노동당은 ‘세금 올리는 정당’이란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큰 타격을 받았고, 97년 토니 블레어 총리가 “임기 동안 소득세를 절대 올리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집권에 성공하기까지 18년간 야당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노동당이 증세하지 않겠다고 공약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집권한 대처 총리도 90년 인두세 도입을 추진했다가 영국 전역에서 납세 거부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기가 급락했고, 이후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결국 그해 11월 사임해야만 했다. 대처 총리를 성공의 길로 이끈 세금이 결국엔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미국에서도 감세·증세 논쟁이 종종 대선의 승패를 좌우했다. 1984년 월터 먼데일 민주당 후보는 감세 공약으로 인기를 모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레이건은 세금을 올릴 것이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는 솔직히 말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사실을 말할 것”이라며 레이건 대통령의 위선을 집중 공격했다. 하지만 정작 유권자들에겐 먼데일 후보가 세금을 올릴 것이란 점만 각인되면서 대선은 레이건 대통령의 완승으로 끝났다.

88년 조지 H W 부시 후보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나를 믿으세요. 절대 새로운 세금은 없을 겁니다”고 공언했고, 이는 초반 부진을 딛고 역전에 성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이는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집권 후 경기 침체가 지속되자 90년 민주당 증세안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대중의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결국 재선 실패로 이어졌다. ‘Read my lips. No new taxes’라는 4년 전 공약은 미국 대통령의 발언 중 최악의 여섯 단어로 꼽혔다.

일본은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세금 이슈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1970년대 석유 파동 이후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자 집권 자민당은 재정위기 타개책으로 일반소비세 도입을 본격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79년 1월 일반소비세 도입을 공식화하면서 그해 10월 총선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중소상공인 등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고 여론도 악화되면서 자민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게 됐다.

이후 일본 정치에서 세제 개혁 문제는 한동안 금기어가 됐다. 그러던 중 86년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자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여세를 몰아 또 다른 간접세인 매상세 도입을 추진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 또한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고 이듬해 지방선거 참패 등이 겹치면서 결국 세제법안을 폐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소비세율 인상 시기를 2014년에서 2017년, 2019년으로 계속 미룬 것도 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감안한 전략적 행보라는 분석이 중론이다.

새로운 세금 신설이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 경우는 캐나다와 프랑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 말 브라이언 멀로니 캐나다 총리는 연방부가세 신설로 역풍을 맞았고 이는 과반을 차지하던 집권 진보보수당이 단 2석만 남기고 전멸하는 참패로 귀결됐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2012년 집권 후 최고 75% 수준의 부유세를 도입하면서 직격탄을 맞았고 이후 지지도가 4%까지 급락하면서 재선 도전마저 포기해야 하는 굴욕을 맛봤다.

박정희 정부, 부가세 도입해 위기 불러

한국의 경우 세금이란 주제가 선거의 주된 쟁점으로 떠오른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고도성장기에 세율도 높지 않았던 데다 지역주의와 이념 갈등이 워낙 첨예하다 보니 세금 등 정책 이슈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역대 정권은 세금 문제로 예기치 않은 곤욕을 치르곤 했고 이는 정권의 위기를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박정희 정부가 1977년 도입한 부가가치세가 대표적이다. 새로운 세금의 추가는 강한 반발을 불렀고 이는 이듬해 총선에서 집권 공화당의 패배로 이어졌다. 79년 부마항쟁 때 거리의 시민과 학생들이 유신 철폐와 함께 외친 주된 구호 중 하나도 부가가치세 폐지였다.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는 국내 정치에서 세금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졌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노 대통령은 “표만 떨어진다”며 여당까지 강하게 반대한 종부세에 대해 “부동산 과세의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며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야당이 내세운 ‘세금폭탄’이란 구호에 여론이 급격히 기울면서 노무현 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렸고 종부세는 진보 정권 10년을 마감하는 데 일조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증세 없는 복지’를 내건 박근혜 정부도 세금 문제로 곤욕을 치르긴 마찬가지였다. 집권 초기부터 ‘13월의 보너스’라는 연말정산을 잘못 건드려 화를 자초했다. 당시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대거 바꾸면서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것”이라고 했다가 직장인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거위 깃털론’의 파장이 예상 외로 커지자 결국 박 대통령이 직접 원점 재검토 지시를 내려야 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패한 뒤 당시 새누리당 내에서는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담뱃세 인상으로 서민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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