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배기 '지하철택배' 기사에게 여고생들 손편지 쓴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할아버지 품에 안겨 지하철을 탄 '꼬마 택배기사' 재범(가명)이. 재범이에게는 지하철에서 보는 풍경들과 지하철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이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할아버지 품에 안겨 지하철을 탄 '꼬마 택배기사' 재범(가명)이. 재범이에게는 지하철에서 보는 풍경들과 지하철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이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할아버지, 엄마 보고 싶어요”

경기도에 사는 다섯 살 손자 재범(가명)이가 보챈다. 누나 재윤(11·가명)이와 형 재희(8·가명)는 학교에 가고 집에 없을 때 재범이는 더욱 엄마가 생각난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재범이네 후원 캠페인 중 #재범이 삼남매, 63세 할아버지와 단칸방 생활 #엄마가 3년 전 집나가 할아버지가 거둬 키워 #할아버지는 '지하철 택배'로 월 50만원 수입 #언니·오빠 학교 가면 막내는 할아버지와 출근 #할아버지 지병인 천식 도져 이젠 일 못 나가가 #인천 학익여고 학생들, 손 편지와 후원금 보내와 #"포기 말고 힘내" "아이들도 할아버지 덕에 용기"

외할아버지 박모(63)씨는 재범이를 안고 단칸방을 나선다.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재범이도 할아버지도 모른다. 엄마는 3년 전 세 아이를 남겨 놓고 가출했다. 도박과 폭력을 일삼던 재범이 아빠가 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다. 혼자 살던 할아버지가 삼남매를 거뒀다.

재범(가명)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지하철역 개찰구를 통과하고 있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재범(가명)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지하철역 개찰구를 통과하고 있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할아버지는 재범이를 안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간다. 지하철은 재범이에게 자기를 먼 곳을 데려주는 수단. 할아버지는 재범이에게 “엄마는 멀리 갔다”고 말한 적 있다. 지하철을 타고 ‘멀리’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재범이는 믿는다. 하지만 지하철에 타선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28일 공개한 재범이네 사연이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www.childfund.or.kr)은 지난달부터 재범이네 후원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재범이 엄마는 연락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다. 할아버지는 지난해부터 ‘지하철 택배’를 했다. 지하철을 타고서 물품을 배달하는 일이다. 이 일로 매월 40만~50만원을 벌어 삼남매를 뒷바라지했다.

큰애들이 학교에 가면 재범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재범이를 데리고 다녔다. 재범이는 세상 구경에 신이 나 지하철 안에서 싱글벙글했다. 지하철 승객들에게도 밝게 인사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지난달 '꼬마 택배 기사' 재범이 사연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지병인 천식이 심해져 지하철 택배일을 못하고 있다. 근로소득이 끊어졌다. 대신 아이들 앞으로 나오는 정부보조금 월 100만원으로 생활한다. 이 중에서 월세로 48만원이 빠진다. 빠듯한 살림에 건강이 나빠져 할아버지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이라도 딸이 돌아오길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큰애들은 이미 마음 속 상처가 깊다.

할아버지 박씨와 재윤·재희·재범(모두 가명) 3남매가 생활하는 다세대 주택.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할아버지 박씨와 재윤·재희·재범(모두 가명) 3남매가 생활하는 다세대 주택.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엄마는 절대 보고싶지 않아요. 우리를 버리고 가버렸으니까. 잡으려고 했는데, 엄마가 뿌리치고 달려가버렸어요. 사실 조금 궁금하긴 해요. 잘 지내는지.”

첫째 재윤이는 초등학교 입학 후 정서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냉동실에 있는 음식을 그냥 꺼내 먹거나, 학교에서 급식을 서너차례씩 먹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돌발행동은 사라졌다. 하지만 엄마의 가출을 기억하고 있고, 아빠의 폭력도 잊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

세 남매의 책가방.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세 남매의 책가방.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지난 25일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앞으로 택배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이는 ‘인천 학익여고 2학년 1~6반 학생 일동’이었다. 상자 안에는 재범이네 삼남매와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응원의 손 편지 30통, 그리고 후원금 17만5800원이 들어 있었다.

학익여고 2학년 학생들이 벼룩시장 활동에서 번 돈 17만5800과, 그리고 응원 메시지가 담긴 손편지 30통을 재범이네에게 전달해달라고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보내왔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학익여고 2학년 학생들이 벼룩시장 활동에서 번 돈 17만5800과, 그리고 응원 메시지가 담긴 손편지 30통을 재범이네에게 전달해달라고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보내왔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학익여고 교사 장명숙씨는 “교내 벼룩시장 ‘아나바다’ 활동을 통해 뜻밖의 용돈이 생긴 아이들이 ‘꼬마 택배기사’ 사연을 듣고 흔쾌히 기부를 결정했다. 할아버지와 재윤·재희·재범이가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고 편지에 적었다.

학생들이 재범(가명)이 가족에게 보내는 손 편지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학생들이 재범(가명)이 가족에게 보내는 손 편지들. [사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학익여고 학생들의 응원은 알록달록한 편지지에 담겨 왔다. 할아버지 박씨에게 보내는 편지도, 언니·누나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있었다. 편지를 읽을 아이들의 눈 높이에 맞춰 글과 함께 만화 캐릭터 등을 그려 넣었다.

 “사람이 힘든 일을 하거나 고생하면 그만큼 복이나 성과가 온다고 믿는다. 포기하지 말고 항상 힘내.”

 한 학생은 첫째 재윤이를 이렇게 응원했다. 또 다른 학생은 “만약 제가 할아버지였다면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을 것 같다. 아기(재범)가 나중에 커서 자신의 환경을 알게 되더라도 분명 할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이해하고 많이 낙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조만간 손 편지와 후원금을 재범이네에 전달할 예정이다.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