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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하면 달라요", 문재인 청와대의 ‘내로남불’ 적응기

중앙일보

입력

“한국 정치인은 저절로 2개 국어를 습득한다. 여당어와 야당어다.”
지난 5월 대선 직후 만난 여권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그러면서 “워딩(발언)만 보면 한동안은 소속 정당이 헷갈릴 수 있으니 앞으로 기사를 쓸 때 꼭 소속을 확인하라”고도 했다.
실제로 지난달 28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고위공직자 배제 기준인 ‘5대 인사원칙’(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전입, 논문 표절, 병역 면탈)이 훼손되는 것과 관련해 “빵 한 조각, 닭 한 마리에 얽힌 사연이 다 다르듯 관련 사실에 대한 내용 또한 들여다보면 성격이 아주 다르다”라고 말하자,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도 “10년 만에 여당이 됐는데, 습득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자조가 나오기도 했다. 구(舊) 여권이 하던 ‘변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의미로 여야의 이중적 잣대를 꼬집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①광우병=지난 19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보고된 광우병 발병과 관련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잠정중단 조치를 요구했다. 민변 측은 “2011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부칙에서 한국이 확보한 권리”라며 “국민의 건강 보호를 위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잠정 중단하고 미국의 동물성 사료 통제 조치 등 광우병 검역의 안전성과 감염 경로 등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수입중단 조치 대신 현물 검사 비율을 기존 3%에서 30%로 상향 조정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지금 수입 중단 조치를 하는 것은 동물보건기구(OIE) 규약에도 어긋나고 한ㆍ미 수입위생조건에도 과잉 대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7월 29일 미국산 LA갈비 등 뼈있는 쇠고기가 검역을 위해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코리아냉장에서 국립수의검역원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08년 7월 29일 미국산 LA갈비 등 뼈있는 쇠고기가 검역을 위해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코리아냉장에서 국립수의검역원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였던 청와대와 여당 인사들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야당일 때는 “광우병 발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온다”는 일부 단체의 목소리를 대변했지만 여당이 되자 입장이 바뀐 셈이다.

2008년 4월 29일 방송됐던 MBC PD수첩 ‘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 편과 관련해 제작진의 의도적인 사실 왜곡 문제를 제기했던 번역가 정지민씨가 2009년 책을 발간한 뒤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씨가 낸 책 제목은 『주 ( 柱 ) , 부제 - 나는 사실을 존중한다』이다. [중앙포토]

2008년 4월 29일 방송됐던 MBC PD수첩 ‘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 편과 관련해 제작진의 의도적인 사실 왜곡 문제를 제기했던 번역가 정지민씨가 2009년 책을 발간한 뒤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씨가 낸 책 제목은 『주 ( 柱 ) , 부제 - 나는 사실을 존중한다』이다. [중앙포토]

 ②한·미 자유무역협정(FTA)=2008년 12월 18일은 ‘동물국회의 밤’으로 불린다. 당일 오후 여당인 한나라당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의 문을 잠그고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상정하려하자 야당 의원들은 해머를 가져와 문을 부수는 등 극렬하게 반발해서다. TV를 통해 중계된 이 사건은 ‘국회선진화법’을 제정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2008년 12월 18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야당이 국회에서 충돌했다. 한나라당은 국회 외통위 회의실의 출입문을 책상 등으로 막은 채 한미 자유무역협정 (FTA) 비준 동의안을 상정했고 야당은 해머로 출입문을 부쉈다. [중앙포토]

2008년 12월 18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야당이 국회에서 충돌했다. 한나라당은 국회 외통위 회의실의 출입문을 책상 등으로 막은 채 한미 자유무역협정 (FTA) 비준 동의안을 상정했고 야당은 해머로 출입문을 부쉈다. [중앙포토]

당시 야당(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한·미 FTA를 ‘신을사늑약’이라고 비판했다. 2012년 대선에 나선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는 한·미 FTA에 대해 “재협상을 통해 불이익을 바로잡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5년 후 대선 승리 이후엔 입을 다물고 있다. 오히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미 FTA 재협상을 하고 있다. 미국에 불공정한 협정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청와대와 정부에선 “재협상 아닌 보완 협상”이라고 진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19일 청와대에서 초청한 여야 대표회담을 거부하며 당시 한·미 FTA 추진을 비난했던 데 대해 먼저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2012년 7월 12일 국회 본회의장 교육 사회 문화에 관한 대정부 질문이 진행되는 가운데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민주당 등 야 3당 대표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2012년 7월 12일 국회 본회의장 교육 사회 문화에 관한 대정부 질문이 진행되는 가운데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민주당 등 야 3당 대표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③인사청문회=인사청문회에 대한 문제 의식만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청문회가 신상털기 등으로 흐르면서 많은 후보자가 자리를 고사했다”(2014년 6월 3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만은 “인사청문회를 후보자 흠집내기 식으로 진행하니 정말 좋은 분들 중에 고사한 분이 많다”(2017년 6월 14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식)는 문 대통령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용준 박근혜 정부 첫 국무총리 후보자는 각종 의혹으로 낙마했다. [중앙포토]

김용준 박근혜 정부 첫 국무총리 후보자는 각종 의혹으로 낙마했다. [중앙포토]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대선 경선을 치르면서 “병역 면탈,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논문 표절, 뭐 한두 개씩은 갖고 있어야 마치 장관 자격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 이제 바꿔야 한다”며 소위 ‘5대 인사 원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지명한 국무총리 및 장관 등 고위공직자 후보 22명 중 15명이 이를 위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7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 참석한 조국 민정수석이 회의장에 입장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17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 참석한 조국 민정수석이 회의장에 입장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한편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2016년 8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음주운전 경력이 있는 이철성 경찰청장을 임명하자 자신의 트위터에 “음주운전 단속의 주무부처 총책임자가 과거 이런 범죄를 범하고 은폐까지 하였는데도 임명했다”며 “미국 같으면 애초 청문회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조대엽 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의 음주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음주운전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④국회 역할 불신론=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국회가 법안 처리에 소극적으로 나서 국정 운영을 지연시킨다는 불만을 수 차례 제기했다. 2016년 1월 정부 업무보고에서도 여야 이견으로 경제 관련 법안과 테러방지법 처리가 늦어지자 “국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까 국민들이 나서서 바로 잡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6년 1월 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종특별자치시 정부 세종컨벤션센터 4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16 정부업무보고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6년 1월 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종특별자치시 정부 세종컨벤션센터 4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16 정부업무보고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 대통령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뒤 5부 요인을 초청한 자리에서 “저는 막 엄청난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그러고 이제 국내에 들어오니까 국회나 정치 상황이 딱 그대로 멈춰 있다”고 국회를 꼬집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5부 요인을 청와대로 초청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5부 요인을 청와대로 초청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이에 대해 김유정 국민의당 대변인은 “각종 고위공직자의 5대 원칙 위반과 탁현민 행정관 논란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 유감을 표명하거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무조건 국회에게 ‘도와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이전에 국회를 무시하던 ‘불통 정부’의 대통령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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