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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디지털 평원의 할매 논쟁, 서로에게 꽃이 되는 호칭이 필요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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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최근 여성 커뮤니티 한 군데서 ‘할매’ 논란이 벌어졌다. 나이 든 여성에게 “할매라는 표현 좀 그만해 달라”는 부탁의 글에 “할매요, 이젠 싫은 것도 받으소”라는 댓글이 바로 붙었다. “할매는 할머니의 방언”이라는 주장에서부터 “나이 관계없이 스마트한 할매면 괜찮다”는 논리도 있었다. “이왕이면 젊게 불러 달라”는 말도 눈길을 끌었다.

“밥하는 아줌마”라는 표현이 정치 쟁점이 되는가 하면 대선 기간 ‘영감탱이’가 친근한 사투리인지 논란이 있었다. ‘꼰대’와 ‘아재’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남녀, 연장자를 구분하거나 부르는 데 호칭 혼란을 겪고 있다.

우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젊은 사람이 많아진 탓이 크다. 생머리에 짧은 치마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50대 여성에게 ‘아줌마’라고 부르기엔 너무 젊고 ‘아가씨’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상황이 흔하다. 희끗희끗한 흰머리에 보드를 타고 게임을 즐기는 60대 남성에게 아저씨라고 해야 하나, 할아버지라고 해야 하나 참 어려워졌다.

60세에 환갑잔치라는 말은 꺼내기도 쑥스러워 사라진 지 오래됐다. 흔히 청년, 중년, 장년, 노년으로 나뉘던 연령별 구분이 ‘청년 같은 중년들’ ‘장년 같은 노인들’이 생기면서 뒤섞이고 있다. 비행기와 극장에서처럼 이제는 성년과 미성년으로만 단순하게 구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세상이 됐다. 예쁜 우리말인 아가씨라는 표현도 술집 여자를 부르는 듯하다며 개인에 따라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다. 영어권에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인 ‘미스 김’이 우리나라에서는 천박한 호칭처럼 된 것은 호칭에 대한 어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세분화되면서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산다. 어감도 다를 수밖에 없다.

혼란을 키우는 데 디지털도 한몫한다. 2007년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디지털 화면에 손가락을 문지르는 것부터 배웠다. 이들은 터치스크린에 익숙한 스마트폰 세대이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이 아이들에게서 세대 차이를 느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소셜네트워킹을 즐기는 사람과 앱 설치가 어려워 음성통화만 쓰는 사람. 이 설명만으로 둘 중 누가 나이가 많은지 알 수 없다. 디지털 적응도는 나이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사회는 유목민 사회와 비슷하다. 농경사회처럼 정주사회는 한 지역에서 오래된 사람이 지식과 경험을 쌓아 권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유목사회는 늘 이동하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낯설고 빨리 적응하는 사람이 권위를 갖게 된다. 그래서 나이가 곧 지식과 경험을 대변했던 과거의 인식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자칫 나이를 들먹이며 따졌다간 ‘꼰대’라는 소리를 듣거나 심지어 나이가 벼슬이냐며 ‘노슬아치’라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

연장자 존중을 도덕률로 배웠던 기성세대들의 상실감이 크지만 사라지는 것은 나이 관련 호칭뿐만이 아니다. ‘각하’라는 호칭도 ‘전하’와 같은 유물이 됐다. 한때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공적 질서를 수호하는 것으로 포장됐던 권위주의 호칭에 대한 인식은 이제 크게 바뀌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오래전 PC통신 때부터 서로를 ‘님’이라고 부르는 전통이 있다.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이와 성별, 신분과 관계없이 그야말로 평등한 호칭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누군가를 부르는 표현은 서로의 관계를 만든다. 호칭 혼란은 디지털 시대,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평 사회를 지향하는 디지털 사회, 서로에게 꽃이 되는 호칭이 필요하다.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