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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 주장한 실세 장관, 여당 대표...위상 추락한 경제부총리

중앙일보

입력

증세 시계가 급격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침을 돌린 건 세법 주무 장관이나 문재인 정부 국정 방향의 큰 그림을 그린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아니다. 현역 의원인 장관과 여당 대표다.

김부겸 장관, 추미애 대표 "부자 증세"주장에 증세론 불붙어 #세법 주관하는 김동연 부총리 입장 뒤집어 #증세 논쟁에서 부총리 소외되는 모습 비춰져 #기재부 공정위에도 밀리는 양상 #"정부에서 부총리 위상 흔들면 안돼"

 지난 20일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은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작심한 듯 “재정 당국이 내놓은 조달 방안이 석연치 않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공개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에 소득세 최고구간은 조절하겠다 했고, 법인세율도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는데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라며 “국민에게 우리 경제 현실을 정확히 알리고 좀 더 나은 복지 등을 하려면 형편이 되는 쪽에서 소득세를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정직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자부 장관이 경제관계장관회의의 공식 멤버 17명에 포함되긴 하지만 회의의 성격상 회의 주재자인 경제 부총리를 제치고 전면에 나서는 일은 이례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왼쪽)가 2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7 국가재정전략회의 첫날 회의에 앞서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왼쪽)가 2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7 국가재정전략회의 첫날 회의에 앞서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

바통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어받았다. 그는 같은 날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법인세와 소득세 명목세율 인상을 주장했다. ‘제안’이라고 했지만, 여당 고위 관계자의 공식적인 발언이어서 무게감이 실린다.

내용도 미리 준비한 듯 구체적이었다. 소득세의 경우 과세표준(세금을 매기는 기준) 5억원을 넘는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40%에서 42%로 올리고, 법인세는 과표 2000억원 초과 구간을 신설해 이런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율을 22%에서 25%로 인상하자고 했다.

이는 단지 추 대표 개인의 뜻이 아니다. 우원식 원내대표는 21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추 대표가 말한 건 당 안에서 정리해 가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여당의 건의에 대해 당·정·청이 협의하겠다”라고 받았다. 증세 관련 당·청 간 교감이 있었을 거란 짐작이 나오는 이유다.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이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이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

한국의 세법을 주관하는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법인세와 소득세 명목세율 인상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수차례 얘기했다. 국정자문위도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부의 국정방향을 보고하면서 법인세, 소득세율 인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장기과제로 미루겠다는 얘기다. 이런 기재부와 국정자문위의 방침을 현직 의원인 장관과 여당 실세 의원이 뒤짚었다.

증세 논의 과정에서 경제 컨트롤타워라는 김 부총리가 한발 비껴난 모양새다. 경제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 상당 수도 증세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면서 부총리의 위상이 떨어질 거란 전망이 현실화한 거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재완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 교수(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부총리의 입지가 좁아보인다”고 말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

문재인 정부 출범부터 새로 부활한 청와대 정책실과 기재부를 비롯한 경제부처 간 역할 분담이 불분명해 혼선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김 부총리의 인사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청와대 실세들에게 부총리가 휘둘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선을 의식해 장하성 청와대 실장은 “경제 비전과 계획은 당연히 부총리가 이끌어 간다”라며 “청와대와 저는 (부총리를) 어떻게 도와드리느냐가 과제”라고 말했다.

김 부총리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달 21일 첫  공식회동을 한 자리에서다. 김 부총리가 경제 컨트롤타워 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다르다. 박재완 교수는 “경제부처가 청와대에 보고하는 라인만 몇 개가 된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이런 과정에서 조율이 되지 않은 가운데 일부 실세 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26일 최영록 기재부 세제실장이“정부는 경유 세율을 인상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자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불과 열흘만인 지난 10일 “몇 단계로 나눠서 경유 전체의 소비를 줄여 가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라며 경유 세율 인상 방침을 내비쳤다. 종교인 과세, 국세-지방세 비율 조정 등에서도 정부내 엇갈린 입장이 여과없이 표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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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내에서도 기재부의 존재감이 낮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재벌 개혁, 골목상권 보호를 담당하는 공정위가 연일 부각되고 있는 점에 비쳐보면 더 그렇다. 이미 관가에서 “공정위원장이 실세 아니냐”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김 위원장은 최근 “나쁜 짓은 금융위원회가 더 했는데 공정위가 더 욕을 먹는다”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에게 사과를 하긴 했지만 ‘모피아(옛 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에 대한 불신을 드러냄과 함께, 그만큼 공정위원장이 '눈치'보지 않고 여과되지 않은 발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제되지 않은 정책 관련 목소리가 잇달아 나올 경우 혼란을 가중시키는 만큼 부총리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장관마다, 정치인마다 증세 같은 중요한 얘기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면 국민은 정부의 말을 불신할 수 밖에 없다”라며 “증세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정부 내에서 치열한 논의를 펼치돼 기재부를 중심으로 정제된 사항을 외부에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완 교수는 “경제부총리 제도가 있다는 건 그만큼 경제가 중요하고 중심을 잡아야 하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뜻”이라며 “경제부총리의 위상을 정부 내에서 훼손하는 일이 있어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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