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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주형환의 침묵, 김동연의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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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은 이중적이다. 사심 없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긍정과 소신 없이 권력에 충성한다는 부정이 겹쳐 있다. 후자 쪽 ‘영혼 없는 공무원’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요즘처럼 정권이 바뀔 때 특히 많아진다. 남들은 ‘소신 없다’고 하는데 본인은 ‘사심 없다’고 한다. 과거는 돌아보지 않는다.

말해야 할 때 입 다무는 건 #소신이 아니라 사심이다

그렇게 보면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만 탓할 일도 아니다. 지난달 27일 그는 원전 건설 중단을 결정한 국무회의에서 침묵했다. 주무 장관이 입을 다무는데 누가 반론을 말하랴. 20분 만에 원전 중단이 뚝딱 결정된 데는 주 장관의 침묵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는 왜 침묵했을까. 주형환은 탈원전 논란이 불거졌던 지난해 9월 “현행법에 따라 정당한 사유 없이 원전 건설을 중단할 수 없게 돼 있다”고 단언했다. 한 달 뒤엔 아랍에미리트(UAE)로 날아갔다. 60년간 연 9000억원, 총 54조원짜리 UAE 원전 운영권 수주를 축하하고 이를 자신의 공적으로 자랑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정책이 철저히 부정당하는 걸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를 아는 많은 이가 “그럴 리 없다”고 의심스러워했지만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은 “산업부 장관님은 발언을 안 하셨습니다”라고 확인했다.

의문은 하나 더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왜 주무 장관, 주형환에게 묻지 않았을까. 문 대통령은 취임 초 박근혜 정부 장관들을 불러 “여러분은 엄연한 문재인 정부의 장관들”이라며 “새 정부에 이어져야 할 것과 개선돼야 할 것들을 조언해달라”고 주문했었다. 청와대 회의에선 “다른 의견도 거침없이 얘기해 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탈원전에 대해 주 장관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배려였나, 무시였나.

백번 양보해 주형환 장관은 지난 정부 사람이니 그렇다 치자.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또 왜 그랬을까. 내년 최저임금이 16.4%로 결정된 바로 다음날 그는 세금으로 인건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밝혔다. 내년에만 약 3조원이다. 정부가 직접 돈을 나눠준다는 발상도 놀랍지만 이를 미리 경영쪽 위원들에게 흘려 임금 인상을 압박한 것은 지나쳤다. 그래놓고 세금으로 인건비를 지원하는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경제 실험’을 하겠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예단하기 싫지만 99% 헛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일을 지휘한 김동연 부총리가 누군가. 내로라하는 예산통으로 누구보다 재정건전성을 소신으로 삼았던 그다. 허투루 쓰는 1원 한 푼의 세금도 아까워했다. 기획재정부 차관이던 이명박 정부 시절엔 여야의 포퓰리즘 공약 이행에 수백조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서를 작성해 발표했다. 선거법 위반이라며 말리는 선거관리위원회 측에 “내가 책임지겠다”며 소신과 결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는 일요일 오후 영세업자 대책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김동연, 당신마저!”의 신파는 읊고 싶지 않다.

다 그런 건 아니다. 결이 좀 다른 인물도 있다. 이관섭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이틀 전 “원전 영구 중단을 막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했다. 산업부 차관을 지낸 그는 내로라하는 에너지통이다. 새 정부 국정 철학에 따라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에는 협조했지만 원전 찬성론자의 소신은 지키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취임했다. 아직 임기가 2년 넘게 남았다. 자리 보전이라는 사심과 에너지 백년 대계라는 소신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소신과 사심 사이, 정답은 사람따라 다를 것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있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그건 소신이 아니라 사심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