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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남자의 책 이야기] 조선이 바닷길 열었더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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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하멜이 표류기를 남겼는데도 왜 네덜란드 사람들은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16세기에 동남아와 일본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포르투갈 상인들도 지척거리인 조선 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에서 사다 팔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둔의 왕국' 조선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물류 흐름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소규모로 이뤄진 조공무역을 제외하곤 대외거래는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그것은 역으로 조선의 물질문명을 형편없이 약화시켰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였는데도 땅에만 집착했다. 그 때문에 우리에겐 그 흔한 왕실컬렉션도 없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가 없었다면 궁궐조차 한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외세와 조우하게 된 조선이 개혁의 기회를 잃고 국권을 상실한 것은 쇄국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바다와 친하지 않은 나라가 성한 경우는 거의 없다. 바다는 유사 이래 물류를 나르는 고속도로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컨테이너 혁명은 해상운송의 비용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 덕분에 호주나 브라질에서 수입한 유연탄과 철광석으로 강판을 만들어 다시 세계 곳곳에 수출하는 제철회사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바다의 역사를, 무역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땅의 역사에만, 반도 내부의 역사에만 과도하게 집착한다. 우리의 근현대 문학도 폐쇄적인 지리공간 관념에 유폐되어 있다. 무역대국을 지향하면서 땅에만 고착된 우리의 인식도 이제는 변해야 할 것이다.

케네스 포머란츠와 스티븐 토픽의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심산문화)은 대중적인 개설서이긴 하지만, 15세기 이후의 무역과 물산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이제껏 서구중심적인 시각에 선 역사서들과는 달리 아시아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원제목인 '무역이 바꾼 세계'를 설탕과 커피의 이야기로 축소시킨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하긴 힘들지만, 전철에서 출퇴근길에 오가며 읽기 좋은 이야기책이다.

양승윤 등 9명의 저자가 쓴 '바다의 실크로드'(청아출판사)도 16세기 이후의 해상무역을 통해 본 세계사 책이다. 이 책도 우리가 소홀히 했던 아시아 무역사에 대한 인식의 공백을 메워준다.

우리 학계의 성과가 묶여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지만, 책 전체의 통일성이 약간 모자란다. '메메트 2세'를 '마호메트 2세'라고 잘못 쓴 곳도 있다.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민음사)은 연애소설 책이지만, 그 스케일은 웅대한 바다의 역사를 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한 이 책은 중국인 타오 치엔과 칠레 여인 엘리사가 역경을 딛고 사랑에 이르게 되는 러브 스토리이다.

주인공 두 사람은 모두 세계사에서 지워져 있던, 중국인 쿨리(이주 노동자), 그리고 제3세계 여성이다. 아옌데의 강점은 페미니스트 연애소설에 그치지 않고, 세계 체제의 역사를 섬세하게 배합한 점이다. 바다에 강한 칠레 출신이라 그런지 우리 소설에 결여된 글로벌 공간 관념이 유난히 돋보인다.

이성형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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