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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는 어둠 속에서 본질을 드러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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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호 08면

달리아1(Dahlia1·2014), X-Rays by Nick Veasey Copyright ⓒ 2017

달리아1(Dahlia1·2014), X-Rays by Nick Veasey Copyright ⓒ 2017

작품 앞에서 두 팔로 X자를 만든 닉 베세이. 그 뒤로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엘비스(Elvis·2015), 슬래시(Slash·2015), 밥 말리(Bob Marley·2017), 캡틴 잭 스패로우(Captain Jack Sparrow·2017)

작품 앞에서 두 팔로 X자를 만든 닉 베세이. 그 뒤로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엘비스(Elvis·2015), 슬래시(Slash·2015), 밥 말리(Bob Marley·2017), 캡틴 잭 스패로우(Captain Jack Sparrow·2017)

1997년의 어느 날, 영국의 한 사진작가가 자신이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엑스레이(X-ray) 촬영대에 슬쩍 올려놓았다. 한 방송국의 의뢰로 콜라캔 안쪽에 감춰진 글씨를 엑스레이 촬영으로 알아내는 실험을 하던 참이었다. 장난처럼 찍어 본 운동화의 엑스레이 사진은 바닥의 헤진 깔창, 안쪽의 늘어진 솔기 등을 그대로 드러내며 ‘고단하다’는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엑스레이 아트’의 거장으로 불리는 닉 베세이(55)가 처음 이 작업의 매력에 빠진 순간이었다. “외피를 걷어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더군요. ‘이것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국내 처음 소개되는 #‘엑스레이(X-ray) 아트’ #작가 닉 베세이

엑스레이는 1895년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1845~1923)이 발견한 광선이다. 인체나 사물에 엑스선을 통과시키면 반사하는 빛을 통해 겉으로 보이지 않았던 대상의 내부가 나타난다. 과학과 의료 분야에서 주로 쓰이던 엑스레이 사진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나온 이가 바로 닉 베세이다.

8월 27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엑스레이맨(X-RAY MAN) 닉 베세이전’은 국내에는 아직 생소한 엑스레이 아트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다. 꽃과 식물 등의 자연에서 자동차, 대형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피사체들의 ‘속살’이 낱낱이 공개된다. 전시를 위해 내한한 작가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만났다.



▶전시는 매일 오전 11시~오후 8시까지(금·토는 오후 9시까지).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휴관.
성인 1만원, 학생 8000원, 어린이 6000원. 문의 02-710-0766


보잉 777(Plane in Hanger·2001)

보잉 777(Plane in Hanger·2001)

작가가 처음 찍은 운동화 엑스레이 사진은 전시장 입구에 걸려 있다. 이 사진을 계기로 엑스레이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가 처음 한 일은 병원 방문이었다. “카메라만 있으면 가능한 사진 작업과는 달리 엑스레이 촬영은 고도로 전문화된 영역이에요. 전문 장비와 공간, 기술이 필요하죠. 아무것도 몰랐던 당시에 처음 떠오른 곳이 병원 엑스레이 촬영실이었고, 무작정 찾아가 이것저것 물으며 기초를 익혔습니다.”

독학으로 방사선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장비를 대여해 주변의 모든 것을 찍기 시작했다. 화단에 핀 꽃에서 집안의 가재 도구들, 옷과 가방, 인형까지 피사체가 됐다. 작업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작품 영역도 오디오·스마트폰 같은 전자 제품에서 자전거·자동차·비행기까지로 넓어졌다. 이번 전시에는 20년 간 그가 찍은 8000여 점의 엑스레이 사진 중 대표작 120점이 소개된다. 전시장은 일상의 물품을 소재로 한 ‘에브리데이 오브젝트&머신(Everyday Object&Machine)’,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우는 ‘네이처(Nature)’, 인체를 찍은 ‘휴먼&이모션(Human&Emotion)’ 옷의 안쪽을 보여주는 ‘패션(Fashion)’까지 4개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2001년 촬영한 그의 대표작 보잉777기 엑스레이 사진이 시원하게 걸려있다.

1885년 트리돈 보디스(Tridon Bodice 1885, 2017)

1885년 트리돈 보디스(Tridon Bodice 1885, 2017)

소재가 다양하다.
“엑스레이로 촬영이 가능한 작은 소품부터 시작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큰 사물들까지 폭을 넓혔다. 보통 한번 촬영에 피사체를 3~10분 방사선에 노출시키는 데, 재질에 따라 강도가 다 다르다. 꽃과 같은 식물은 약한 강도로 조심스럽게 촬영해야 하고, 철물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소재별로 적절한 선량과 시간을 찾아가면서 최고의 결과물을 내는 게 내 작업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한 작품을 촬영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나.
“디테일한 이미지를 완성하려면 반복 작업이 필수다. 드레스 하나를 찍는 데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한다. 보잉777 촬영 프로젝트는 1년 가까이 걸렸다. 날개 한쪽만 해도 25m가 넘는 대형 비행기이기 때문에 각 부분을 세세하게 나눠 찍은 1000여 장의 필름을 추후에 합성해야 했다. 보잉777기의 엔진은 이 전시장보다 크기 때문에 부분 촬영도 불가능했다. 주물 회사에 의뢰해 실제 엔진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었다.”
항공사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프로젝트였을 것 같다.
“처음 의뢰를 받을 때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비용이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꼭 완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의 엑스레이 작업이 고도의 정밀성을 요구하는 항공기의 특징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모든 부품을 자유롭게 가져다 쓸 수 있게 해 준 보잉사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 작품은 지금도 미국 보스턴의 로건 공항 출입구 전면에 실물 크기 사진으로 걸려 있다.”
특히 애착이 가는 대상이 있나.
“자연을 찍는 것이 가장 좋다. 내 작업은 외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어떤 생물이나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엑스레이를 통과하면 아름다움과 추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귀여운 곰 인형도 엑스레이를 통해 내면의 얼기설기 꿰맨 자국을 드러내면 섬뜩하게 보일 수 있다. 반면 꽃 사진들을 보라. 그냥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엑스레이로 들여다보면 꽃잎 안쪽 줄기의 오묘한 곡선이나 겹쳐진 이파리들의 하늘하늘한 질감 등이 환상적으로 드러난다. 마치 우주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원래 패션 사진가 출신이고, 옷 촬영도 많이 했다.
“나는 반(反) 패션주의자다. 흔한 패션 사진은 아름다운 여인이 값비싼 옷을 입고 멋진 장소에서 포즈를 취하며 옷에 대한 ‘가짜 환상’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다. 엑스레이 작업은 다르다. 옷의 원래 역할, 그 기능에만 집중한다. 안쪽의 솔기는 어떻게 처리했고, 마감은 얼마나 깔끔히 되어있는가. 제대로 만든 옷인지 아닌 지가 오롯이 드러나는 셈이다.”
영국의 빅토리아앤앨버트 미술관 (The V&A Museum)과 협업해 소장품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클래식 의상을 찍었다. 에르메스, 알렉산더 매퀸, 돌체 앤 가바나 등 명품 브랜드 제품 촬영도 많이 했다.
“명품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짜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진짜 잘 만든 옷들은 엑스레이 촬영으로 드러나는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V&A 미술관에 있는 의상이나 장신구를 찍어본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오래된 의상을 훼손하지 않고 찍는 것 역시 새로운 도전이었고. 개인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의상들은 내부 상태와 숨어있는 레이어 구조까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테디 베어(Fluffy Teddy Bear·2008)

테디 베어(Fluffy Teddy Bear·2008)

셀피(Selfie·2015)

셀피(Selfie·2015)

그는 전용 작업실이 둘 있다. 하나는 한적한 교외에 지은 7m 두께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싼 스튜디오다. 가격이 30만 유로(약 3억 9000만원)에 달하는 전문 엑스레이 기기는 스위스의 한 회사에서 협찬 받아 사용한다. 올해 초 V&A 프로젝트를 하면서는 이동식 엑스레이 작업실도 구비했다. 방사능 유출을 막기 위해 5cm 두께의 납으로 마감한 콘테이너다.

촬영 만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그는 “다른 예술 작업과 마찬가지로 작품에 메시지를 담고, 그것을 엑스레이 사진의 특성을 활용해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전시에 나온 담뱃대나 변기 엑스레이 사진은 르네 마그리트나 마르셀 뒤샹의 현대미술 작품을 새로운 각도로 보여주려는 시도다. 인물 사진에서 메시지는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셀피를 찍거나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 화려한 옷으로 온 몸을 휘감은 해골 등은 ‘인간 본연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

인체 촬영은 어떻게 하나.
“살아있는 사람을 수분 동안 방사능에 노출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기증 동의서를 쓰고 사망한 사람의 시신(프리다·Frieda)를 촬영한다. 동작을 표현하려면 사후 경직이 끝나기 전인 사망 후 8시간 이내에 찍어야만 한다. 악취에 고통 받기도 하고, 무서움에 몸을 떨기도 하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놀라운 인체 구조를 볼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실제 사람들의 항의도 있었는데.
“1998년 한 정형외과의 의뢰로 버스에 탄 사람들의 모습을 엑스레이로 찍어 뉴욕 맨해튼을 오가는 통근 버스에 부착한 적이 있었다. 물론 버스를 따로 촬영하고, 시신을 움직여가며 사람들의 동작을 연출해 합성했다. 하지만 해골이 탄 버스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기분 나쁘다는 항의가 있어 일주일 만에 광고를 내려야 했다. 엑스레이로 인체를 보여주는 것은 외형에 대한 집착의 무의미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멋진 옷을 입은 미남이든, 누더기로 몸을 감싼 걸인이든 엑스레이로 들여다보면 모두 똑같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미추도 귀천도 없다.”
건강은 괜찮은지.
“안전 수칙을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처음 엑스레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성능이 좋지 않은 기기를 사용하다 2번 정도 기준 이상의 방사능에 노출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고, 두 명의 건강한 아이를 낳아 키웠다.”
엑스레이로 찍고 싶은 것들이 아직 남아 있나.
“물론, 무궁무진하다. 나는 꿈도 엑스레이 화면으로 꾸는 ‘엑스레이 너드(nerd·하나에 깊이 빠진 괴짜)’니까(웃음). 클래식 자동차 작업을 계속 하는 중이고, 잠수함이나 우주선 촬영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여왕이 빌려주기만 한다면 엘리자베스 2세의 왕관을 찍어보고 싶다. 가장 존귀하다 여겨지는 상징물의 내면은 어떤지 궁금하지 않은가. 한국에 처음 왔으니 여기서도 찍고 싶은 것들을 잔뜩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전시를 보러 온 한국 관람객들이 내 작품을 보며 단순히 ‘예쁘다’ ‘무섭다’의 감상만이 아닌,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어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ㆍ2017 엑스레이맨 닉 베세이전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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