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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목소리 내기 시작한 비혼 여성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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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여성운동가로 활동 중인 최혜린(26)씨는 지난달부터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성들을 모아 '주거 공동체'를 꾸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공동체 이름은 '비건(vegan)·비혼·페미 하우스'(비비페 하우스)다. 채식주의·비혼·페미니스트, 이 세 가지가 공동체 가입 조건이다. 그는 "함께 부조리에 분노하고 서로 지지해줄 수 있는 관계, 기존의 가족보다 더 강한 유대감을 가진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화장품 브랜드 'SK-ll'는 최근 캠페인 '#INEVEREXPIRE(#나이에유통기한은없다)'을 시작했다. '여자는 때 되면 결혼해야지' 등 사회적인 시선에 얽매이지 말고 여성이 본인 의지대로 당당히 살 수 있도록 응원하는 캠페인이다. 지난달 26일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씨는 JTBC 예능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비혼족도 축복받고 행복할 수 있다. 나이엔 유통기한이 없으니 다들 열심히 삶을 즐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본인의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행복한 비혼'을 선언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정한 '결혼 적령기'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결혼으로 짊어지게 될 경력 단절·고부 갈등·‘독박’ 육아 등을 거부하고 똘똘 뭉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

그런 움직임이 새로운 집단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전북 전주시의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비혼들의 비행) 협동조합'은 2003년 2월 비혼 여성들의 작은 소모임으로 출발해 현재 여성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교육과 여행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는 협동조합 형태가 됐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7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자료를 보면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여성은 31%였다. 통계청의 '2016년 혼인 통계'에서도 2012년 32만7100건이던 혼인 건수는 지난해 28만1600건으로 줄었다. 통계청이 처음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4년 이후 최저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0년 차 직장인 김모(32)씨는 "한창 경력을 쌓고 있는 이 시점에서 결혼을 하는 것이 내 삶에 큰 도움을 줄 것 같지 않다. 굳이 안 할 생각은 없지만 조급해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 나름의 행복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개인적으로 '시(시댁·시부모·시누이 등)'자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버틸 자신이 없다"고 덧붙였다.

비비페 하우스를 추진하는 최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다고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까지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진심으로 의지할만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지만 최씨는 "그게 꼭 결혼을 통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 결혼할 생각 없어'라고 말하면 꼭 몇몇 지인들은 '너같은 애들이 제일 먼저 시집가', '어디 안 가나 보자'라고 받아쳐요. 결혼을 꼭 해야만 삶이 완전해지나요? 자꾸 그런 삶을 사회로부터 강요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요. 지금의 저는 제 모습 그대로 '완전한 존재'인데 말이에요."

미국은 2009년 기혼 여성 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졌다. 당시 인구조사국에서는 이를 '드라마 같은 역전'이라 평가했다. 미국의 비혼 여성들은 2012년 대선에서 67%가 당시 대선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표를 던져 정치적으로도 강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싱글 레이디스』의 저자 레베카 트레이스터는 책에서 "오래 전부터 사회는 '결혼은 여성 존재의 표지이자 기준이 돼야 한다'고 강요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싱글 여성은 이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으며 자신들을 위한 새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여성들의 '성평등' 인식이 높아질만큼 높아졌다. 하지만 전통적인 결혼 제도 안에는 여전히 가부장제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여성들은 그걸 굳이 돌파하면서까지 결혼을 하고싶지 않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비혼 여성의 증가를 저출산 문제와 엮지만 유럽의 경우 동거율이 높고 다양한 가정의 형태가 있는데도 출산율이 한국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국가의 지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누군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없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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