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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경영 공백 유발하는 ‘정치 과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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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태희
박태희 기자 중앙일보 팀장
박태희 산업부 기자

박태희 산업부 기자

권오현(삼성전자 부회장)·조성진(LG전자 부회장)·황창규(KT 회장)·권영수(LG유플러스 부회장)·박정호(SKT 사장)….

대한민국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를 이끄는 대표 최고경영자(CEO)들이다. 이들의 경영 시계가 4일 일제히 멈춰 선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가 이날 예정된 유영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 인사청문회에 이들 CEO를 모두 증인으로 채택해서다. 국회가 통신정책 국정감사에서 이동통신사 CEO들을 증인으로 채택한 일은 있었지만,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 민간 기업 CEO를 대거 부른 것은 이례적이다. 국회의 ‘호출’에 이들은 일제히 일손을 놓고 청문회 준비에 돌입했다.

기업의 ‘새 정부 피로증’이 심해지고 있다. 정치 일정에 동원되는 일이 잦아서다. 경영 공백 중인 이재용 부회장을 대신해 삼성전자 중장기 사업을 챙기고 있는 권오현 부회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권 부회장은 지난달 23일 김상조 공정위원장이 마련한 4대 그룹 정책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어 곧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사절단에 포함돼 27일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권 부회장이 출국한 날은 삼성전자가 1년에 두 번 여는 글로벌 전략회의가 잡힌 날이었다. 이 회의에는 삼성 사장단, 해외법인장 등 국내외에서 모인 200여 명의 임원이 참석한다. 출국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다 보니 삼성전자는 권 부회장이 주재하는 회의를 오후에서 오전으로 급히 변경해야 했다. 이렇게 출국한 권 부회장은 귀국과 동시에 장관 인사청문회에 참석해야 한다.

청문회는 공직 후보자의 도덕성, 업무 수행 능력을 검증하는 자리다. 특정 이슈를 놓고 공방을 벌여서는 ‘인사 검증’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미방위원들이 굳이 통신요금과 관련해 업계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면 실무를 가장 잘 아는 임원을 부르거나 서면 보고를 받아도 되는 일이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의원들이 CEO를 대거 부르니 당장 ‘권위 과시용 ’, ‘통신사 군기 잡기용 ’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지난해 말 발표한 ICT 발전지수에서 우리나라는 175개국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민간 기업의 노력과 기업가 정신 덕분이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과정에서 IT 정책을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라는 말로 요약했다. 기업인을 잘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하지 않고서는 일자리 창출도, 경제 살리기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박태희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