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명동 주둔 청나라 군대의 첫 임무는 대원군 유괴와 납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서울 중구 명동 초입에 있는 중국대사관은 주한 외교공관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연면적 1만7199㎡에 이르며 각각 24층과 10층짜리 건물로 이뤄졌다. 전 세계 중국대사관 중에는 미국 워싱턴의 주미 중국대사관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연면적 1만2012㎡인 중구 정동의 러시아대사관보다 5000㎡가량 더 크다. 9871㎡ 크기의 광화문 미국대사관의 2배에 가깝다. 큰 것을 좋아하는 중국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도 있다. 이 중국 대사관 자리는 한국 및 중국의 역사와 함께해온 유서 깊은 곳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무너져가던 조선과 저물어가던 청나라의 궤적이 이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그리고 한중관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이곳에서 명멸하거나 깊숙이 관련을 맺었다. 명동 중국 대사관에 얽힌 역사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5회 연재한다.

임오군란 뒤 청나라 군대 주둔 #대원군 납치로 시작한 비극의 역사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

중국 대사관 자리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쓰이다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를 수립하면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은 1882년 이후 중국이 사용해왔다. 역사를 살펴보자.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발발해 구식 군대와 위정척사파의 도움을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다. 고향인 경기도 여주로 황급히 피난한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실각시키려고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청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결정했다. 책임자인 청나라 제독 오장경(吳長慶, 1834~1884)은 산둥성 옌타이(煙臺)에서 군함 3척과 상선 2척에 3000명의 병력을 태우고 경기도 남양만의 마산포(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마산포)에 상륙했다.
7월12일 한성에 입성한 청군은 당시 낙동(駱洞)으로 불리던 명동과 용산 등 한성 여러 곳에 나누어 주둔했다. 오장경은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 간 좌포대장 출신 이경하(1811~1891)의 낙동 집을 차지했다. 바로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다. 이곳에 자리 잡은 청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내정간섭을 위한 요인납치였다. 오장경은 흥선대원군과 회담을 한다며 유괴한 다음 억류해 남양만으로 데리고 가서 배에 태우고 중국 톈진(天津)으로 납치했다. 조선을 호령하던 흥선대원군은 4년간 톈진의 보정부라는 관청에 억류됐다. 중국이 한국의 내정에 대놓고 개입한 것이다.

임오군란 당시의 한국군 훈련원 [출처: 중앙포토]

임오군란 당시의 한국군 훈련원 [출처: 중앙포토]

이는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외교 참화로 통한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오래도록 책봉과 조공 체계였다. 형식적으로 책봉을 받고 조공외교만 하면 중국은 조선의 독자성과 주권을 사실상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임진왜란(1592~1598) 기간 명나라의 파병과 정묘호란(1627) 당시 후금의 침략, 병자호란(1636~1637) 때 청(후금이 1636년 이름을 고침)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중국은 조선에 군대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의 파병은 이러한 전통적 관례를 무시하고 조선의 내정을 무력으로 간섭한 첫 사례가 됐다.
이때 군역을 맡을 청나라 민간 상인 40명도 함께 들어왔다. 군대의 주둔이 길어지자 이들은 조선인을 상대로 장사도 했는데 이들은 근대에 들어 한국에서 활동한 첫 화교에 해당한다. 이들은 산둥(山東) 출신이 아니라 남방출신으로 알려졌다. 청나라가 2년 뒤 일본과 톈진조약을 맺으면서 군대를 철수시킬 때까지 이들은 조선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톈진(天津)에 유배당했을 때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출처: 중앙포토]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톈진(天津)에 유배당했을 때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출처: 중앙포토]

1882년 10월4일 주둔군을 등에 업은 청나라는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조약을 체결하고 청나라 상인의 지원에 나섰다. 이 장정은 청국조계지의 설정과 수도 한성의 상업 개방, 청상을 도와줄 상무위원의 파견과 이들에 대한 치외법권 부여 등의 내용을 담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의 실권자인 북양대신이던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1883년 9월16일 진수당(陳樹棠)이 총판조선상무위원(總辦朝鮮商務委員)으로 조선에 부임해 1885년 9월23일까지 2년간 재임했다. 그는 청나라 군대를 배경으로 조선을 압박해 1883년 9월에는 한성에 상무위원공서(총영사관에 해당)를, 11월에는 인천에 상무위원부서(영사관)를 각각 설치했다. 이는 한국에 들어선 첫 외국 상주공관이었다. 진수당은 청나라 상인을 위해 인천에 치외법권지역인 조계도 설치했다. 진수당은 한성의 상무위원공서 사무실을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낙동의 이경하 저택에 설치했다. 청나라 군대의 주둔지에서 외교공관으로 위상을 바꾸게 된 것이다. 중국대사관 자리의 역사는 이처럼 조선의 비극과 함께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더 큰 비극의 서막이었을 뿐이다. 이 정도는 그 다음에 전개될 충격적인 사건에 비하면 약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