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 나와 주경야독한 대법관 후보자...'비서울대·여성' 2명의 대법관 후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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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아….”
16일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 제청된 조재연(61·사법연수원 12기) 변호사는 본지 기자의 전화를 받고 제청 소식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조 후보자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날 이상훈·박병대 전 대법관 후임으로 조 변호사와 박정화(51·20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했다.
 조 후보자가 놀란 것처럼 그의 인생 역정은 서울대 법대로 시작하는 기존의 전형적인 대법관 후보들의 코스가 아니었다. 1974년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사한 것이 그의 첫 사회 생활이었다. 상고 진학은 선친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때 함경남도 원산에서 피난을 와 강원도 일대에서 탄광과 벌목장에서 닥치는 대로 일해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가난한 수재들이 모이는 덕수상고를 나와 안정된 직장을 얻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방송대 경영학과를 다니다가 1976년 성균관대 법학과 야간에 입학해 못다 한 학업을 이어갔다. ‘주경야독’의 시간 끝에 1980년 대학을 졸업한 해에 치른 22회 사법시험에서 그는 수석을 차지했다. 안타깝게도 부친은 그의 합격 소식을 듣지 못했다. 같은해 중풍으로 쓰러져 작고했다. 이후 장남으로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는 가장이 된 그는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 11년 뒤인 1993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판사 시절에는 여러 시국 사건에서 소신 판결을 남겼다. 1985년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내용의 ‘민중달력’을 제작해 배포한 이들에게 검찰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자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들며 기각했다. 야당 의원들의 국회 발언을 모은 『민주정치1』이라는 서적을 출간했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즉심에 회부된 출판사 대표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조 후보자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남은 임명 절차를 성실히 준비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박정화 후보자는 남성 중심의 사법연수원 기수·서열 관행을 깬 발탁 인사로 평가된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한 8명의 후보들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리고 사법연수원 기수도 가장 낮았다. 광주중앙여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박 후보자는 서울행정법원의 첫 여성 부장판사란 기록을 갖고 있다. 남편 박태완(50·33기) 변호사와 오빠 박철환(65·14기) 변호사도 판사 출신인 법조인 집안이다. 대학 때 만난 남편은 연수원 기수로는 13년 후배다.
 박 후보자는 노동 관련 재판에서 근로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판결로 주목을 받았다.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쌍용자동차 근로자에 대해 부당해고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먼저 신고된 ‘유령집회’ 때문에 나중에 신고된 집회를 금지해선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에서 사법개혁을 주도했던 진보 성향 법관들의 학술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원이기도 하다. 그와 대학 동문인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은 “꼼꼼하고 공평한 재판 진행으로 법원 안팎에서 신망이 높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대법관 후보 지명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향후 대법원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신선한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비 서울대, 비 현직법관’의 대법관 등용을 요구해 온 대한변협의 김현 회장은 “대법관의 다양성을 확보한 탁월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대법관후보추천위의 당연직 위원인 정용상 한국법학교수회장(동국대 법학과 교수)도 “이념적 성향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명분을 살린 양승태 대법원장의 묘수”라고 평했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소수 의견 확대 등 판결의 다양성 측면에선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보 성향 재야 법조인의 대표격으로 후보군에 올랐던 민변 회장 출신 김선수(56·17기) 변호사는 최종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대법관 후보는 국회 인사청문회와 임명 동의를 거쳐 문 대통령이 최종 임명한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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