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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로(廢爐)의 경제학’ … 고리 1호기 해체기술 쌓으면 연 9조원 시장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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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고리 1호기

고리 1호기

‘160’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집계한 영구 정지된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의 수다. 13일 현재 19개국 160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을 영원히 멈춘 상태다. 19일 0시면 이 통계 숫자에 1이 더해진다. 고리 1호기가 가동 40년 만에 영구정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날부터 원전 해체 즉 ‘폐로(廢爐)’를 준비하는 스무 번째 국가가 된다.

완전히 멈춘 원전 전 세계 160개 #국내도 2030년까지 12기 수명 끝나 #폐로 비용 1기당 1조 넘는 신 산업 #경험 있는 나라 미·독·일 등 극소수 #정부,600억 들여 노하우 확보 나서 #즉시해체 이점 많지만 폐기물 골치

원전 해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원자로 가동 정지는 시작일 뿐이다. 이후 ▶해체 준비(해체계획 수립 등)▶사용후핵연료 냉각·반출▶제염(방사능 오염물질 제거) 및 시설물 철거▶
부지 복원의 4단계를 거쳐야 한다. 모든 과정을 마치는 데 빨라도 최소 15년이 필요하다. 시간만 오래 걸리는 게 아니다. 고난도 작업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원전 시설과 설비를 안전히 제거해야 한다. 사용후핵연료 등 폐기물 처리도 만만치 않다.

땅도 원전이 지어지기 전 상태로 돌려놓고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어야 한다. 토양이 완전히 복원되는 데는 30~40년이 걸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1967년에 영구정지된 미국 CVTR 원전은 완전 해체에 42년이 걸렸다. 전 세계에서 영구 정지된 160개 원전 중 해체를 완료한 건 19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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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도 만만치 않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산한 고리 1호기 해체 비용은 6437억원이다. 방사성 폐기물·구조물 및 사용후핵연료 처리, 원전 해체 작업에 들어가는 사회적 갈등비용 등을 고려하면 1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비용도 해체 기간이 길어지면 늘어나게 된다. 원전해체 비용은 방사성폐기물관리법에 따라 2년마다 재산정된다.

그런데도 폐로는 숙명(宿命)이다. 원전은 무한정 운용할 수 없다. 원전의 수명은 보통 30~40년이다. 2030년엔 국내에 가동 중인 원전 중 설계 당시 정한 원전 수명(설계수명)을 넘기는 곳이 12기로 늘어난다.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정부가 폐로 프로젝트에 착수한 이유다.

이 과정에서 뜻밖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다.  ‘폐로 산업’ 발전 가능성이다. 원전 해체는 세계적 현상이다. 1956년 영국에서 최초로 상업용 원전을 운행한 이래 현재까지 611개의 원전이 지어졌고, 현재 449곳이 가동중이다. 하지만 2020년을 전후로 1960~80년대에 지어진 원전 대부분이 한계 수명에 이르게 된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2015~2019년까지 76곳, 2020년대엔 183곳, 2030년대에도 127곳의 원전이 한계수명에 다다를 전망이다. 거대한 원전 해체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영국 컨설팅 회사 딜로이트는 2030~2049년의 원전 해체시장의 규모를 총 185조원, 연평균 9조 2000억원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김희령 울산과학기술원 원전해체핵심요소 기술연구센터장은 “IAEA는 전 세계에 가동 중인 원전을 모두 해체하는 데 약 1848억달러(약 200조원)가 들 것으로 추산한다”며 “연구용 원자로, 핵연료주기시설 등 각종 부대 장치를 해체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관련 시장은 약 9000억달러(약 100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선 미국을 제외하면 뚜렷한 선두 주자가 없다. 원전 해체는 관련 기술 개발 뿐 아니라 해체 경험이 중요하다. 원전 해체를 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는 미국, 독일, 일본 뿐이다. 김창락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원전 해체 기술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도 시험용 원자로만 해체해 봤다”며 “원전 해체 시장은 폭증할 수요를 고려하면 도전해볼 만한 ‘블루오션’”이라고 말했다.

기술 개발을 통해 다른 산업 발전도 꾀할 수 있다. 김희령 센터장은 “원전 해체는 기계·건설·조선분야의 절단·철거 기술에 방사능 오염 제거 기술을 접목한 것”이라며 “원전 해체 과정에서 파생한 기술을 화학·기계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원전 해체 기술 경쟁력은 선진국에 비해 떨어진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 등 선진국의 80% 정도의 기술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현재 원전 해체에 필요한 58개 기술 중 41개만 확보했다. 한수원은 고리 1호기 가동을 중지한 후 해체 계획 수립과 사용후핵연료 냉각·반출 작업 등을 마치고 2022년부터 본격적인 해체에 나설 계획이다. 정부는 남은 5년 동안 관련 기술 확보에 나설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30년까지 기술개발비 4419억 원 등 총 6163억원을 투입해 원전 해체 기술 확보에 나서기로 했다.

기술이 확보된다고 해도 해체 경험은 여전히 부족하다. 한국은 미국에서 들여온 원자로 ‘트리가 마크2’와 ‘트리가 마크3’를 해체한 적이 있다. 하지만 발전용량이 작은 연구용 원자로였다. 상업용 대형 원전을 해체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전무했던 원전 건설·운용 기술을 선진국에서 빠르게 습득해 수출까지 이뤄낸 경험을 살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백원필 원자력연구원 부원장은 “고리 1호기를 원전 해체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과 경험을 쌓는 ‘테스트 베드’로 활용해야 한다”며 “이를 바탕으로 향후 수명이 종료되는 다른 국내 원전의 폐로 과정에서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원전해체 해외선…‘즉시해체’ 대세지만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확보가 관건

원전 해체 방법은 크게 ‘즉시해체’와 ‘지연해체’ 로 나뉜다. 원전이 정지된 후 원자로 내 핵연료의 열이 식길 기다린 뒤 사용후핵연료를 떼어내 헤체에 나선다는 점은 두 방법이 같다.

다른 점은 해체 기간이다. 즉시해체는 15년 내외로 원전 내부의 관련 설비를 모두 제거하고 부지 복원까지 완료한다. 반면 지연해체는 이 기간을 60년 내외로 잡는다. 방사성 물질의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를 활용해 원전 시설에 묻은 방사성 물질이 자연스레 줄기를 기다린 뒤 해체에 나서기 때문이다. 즉시해체는 부지를 빠르게 복원해 재사용할 수 있지만, 해체 과정에서 방사능이 유출될 우려가 지연해체보다 크다. 지연해체는 방사선 피폭 확률은 줄일 수 있지만, 오랜 기간 원전을 관리해야 해 큰 비용이 들어간다.

주요 원전 선진국들은 지연해체에서 즉시해체 방식으로 정책을 바꾸고 있다. 단기간에 원전 부지를 사용할 수 있고, 원전 해체를 경험한 인력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 등이 이유다. 고리1호기도 ‘즉시해체’ 방식으로 폐로 될 예정이다. 즉시해체 방식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미국이다. 해체가 완료된 15기의 원전 중 13기가 즉시해체 방식을 적용했다.

즉시해체엔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이 충분한지가 관건이다. 김창락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이 즉시해체 방식을 적용할 수 있었던 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각종 시설 폐기물 관련 처리장을 이른 시일에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다른 국가들은 처리장 확보가 힘들어 즉시해체 방식으로 전환해도 완료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계 2위 원전 국가 프랑스는 2000년 지연해체에서 즉시해체로 방침을 바꿨지만, 아직 해체가 완료된 원전이 없다. 원전 운용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영국은 아예 ‘지연해체’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독일은 3기의 원전을 해체 완료했지만 방사성 폐기물은 원전 부지 주위에 저장하고 있다. 일본은 1996년 동력시험로인 JPDR을 완전 해체했지만 상업용 원전과 구조가 유사한 시험용 원자로였다. 일본 최초의 상업용 원전인 도카이 1호기가 1998년 영구정지에 들어갔지만 폐기물 처분 장소를 정하지 못해 폐로 일정이 늦춰지고 있다.

김 교수는 “선진국이 즉시해체를 완료하지 못했다는 점은 도전자인 한국에겐 희망적”이라며 “한국도 사용후핵연료 처리장 등을 마련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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