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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 워터게이트부터 트럼프까지…미국을 뒤흔든 청문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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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현지시간)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은 "트럼프 행정부는 나와 FBI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증언했다. [AFP=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은 "트럼프 행정부는 나와 FBI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증언했다. [AFP=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실시된 제임스 코미 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청문회가 미국을 뒤흔든 역사적 청문회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청문회는 미국 정계에 중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여론을 주도하며 국면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 광풍, 전무후무한 대통령 사임으로 이어졌던 워터게이트 파문 등 굵직한 스캔들의 향방은 모두 청문회로 결정됐다.

굵직한 스캔들의 향방은 청문회서 결정 #증언 내용과 태도에 따라 여론 반응 엇갈려 #'매카시즘' 창시자 매카시는 대중 외면받고 의원직 상실 #"나는 애국자" 호소한 노스는 범법 행위 불구 영웅 대접 #끝까지 버티던 닉슨, 청문회서 내부고발 잇따르자 결국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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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로 흥한 매카시, 청문회로 망하다

매카시즘 광풍을 잠재웠던 '육군-매카시 청문회'는 전국에 생중계되는 청문회의 영향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매카시즘은 1950년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미 국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며 일으킨 미국 내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이다.

이 발언으로 일약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매카시는 당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4년 간 수백 명을 청문회로 불러들여 공산주의자란 굴레를 씌웠다. 이 기간 동안 1만여 명이 공산주의자란 의혹을 받고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만큼 매카시즘의 위세는 막강했다.

청문회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매카시를 무릎 꿇게 만든 것은 바로 청문회였다. 1954년 매카시는 공산주의자들이 육군에서도 득세하고 있다며 육군을 대상으로 청문회를 열어 육군 장성 출신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을 분노케 했다. 이에 상원은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육군과 매카시를 불러들여 청문회를 열었다.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된 이 청문회는 매카시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냈다. 매카시는 육군 내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시하며 상대측의 반박엔 폭언과 인신공격으로 일관했다.

이를 보다 못한 육군 측의 조셉 웰치 법률고문은 "죄 없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살해하는 짓은 그만 두라. 당신에겐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조금도 없느냐"고 일침을 가해 매카시의 막무가내에 질린 청중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웰치의 이 발언은 지금까지도 매카시즘을 잠재운 명대사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 청문회 이후 지지 기반을 잃은 매카시는 그해 12월 상원에서 불신임을 당했고, 3년 뒤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의 사임 이끌어낸 청문회 내부고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말도 청문회에서 드러났다. 워터게이트는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고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사무실을 불법 도청하려다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72년 DNC 사무실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됐을 당시엔 아무도 그것이 닉슨 대통령의 소행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관련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73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백악관 법률고문인 존 딘에게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딘은 사건에 대해 증언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찾아가 돈을 건네거나 정치적 보상을 약속하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닉슨 행정부가 도청의 배후임을 시사하는 증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수사의 칼끝은 닉슨 대통령을 향했다. 상원은 워터게이트 청문회를 열고 딘을 증인으로 불렀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사건 은폐를 주도한 딘은 TV로 전국에 생방송되는 청문회에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8시간에 걸쳐 담담히 증언했다. 닉슨 대통령이 어떤 방법으로 불법 도청을 했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어떻게 FBI의 수사를 방해했는지가 딘의 증언으로 낱낱히 드러났다. 이에 따라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문제는 증거였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청문회에 출석한 알렉산더 버터필드 전 백악관 부보좌관은 대통령의 집무실에 대화를 녹음하기 위한 감청 장치가 설치돼 있고,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지시한 내용이 그 장치에 녹음돼 있다고 폭로했다. 모든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는 녹음 테이프가 이듬해 공개되면서 닉슨 대통령은 마침내 사임을 발표했다.

청문회가 전화위복 되기도

의혹의 대상자들이 오히려 청문회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사례도 있었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적국 이란에 무기를 불법 판매하고 그 수익으로 니카라과의 친미 반군 '콘트라'를 지원했다는 의혹에 휘말리면서 이를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당시 민주당은 이 의혹을 입증할 핵심 인물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소속 올리버 노스 중령을 청문회에 소환했다.

노스의 위법 행위는 명확했다. 이란에 무기를 판 수익을 콘트라에 지원하는 사업엔 노스의 역할이 주도적이었다. 그러나 노스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일이 미국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 노스는 자신이 한 일을 레이건 대통령과 상의한 적이 결코 없다며 레이건 대통령과의 연관을 부인했다.

잘생긴 얼굴에 말쑥한 군복 차림으로 청문회에 출석해 단호한 태도로 자신이 애국자임을 강변하는 노스의 모습은 대중의 호감을 샀다. 범법자인 노스는 순식간에 미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당시 시사지 타임이 노스를 "슈퍼스타"라 소개할 정도였다. 노스가 출석한 청문회의 시청자는 5500만 명으로 당시 인기 드라마 '종합병원' 시청자 수의 5배에 이르렀다. 노스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와 뱃지 등 관련 상품까지 출시됐다.

 당시 탄핵론까지 나오는 등 정치적 곤경에 처했던 레이건 대통령은 노스의 인기에 힘입어 지지율을 회복하고 입지를 다졌다. 레이건 대통령과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연루 여부는 끝내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노스는 증언의 대가로 면책특권을 약속받아 역시 책임을 피했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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