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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마음의 여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4호 30면

[삶의 방식] '스물세 번째 질문'

‘삶의 방식’ 칼럼을 매달 읽고, 잊지 않고 코멘트를 해 주는 지인이 있다. 대학 1학년 때 알게 됐으니 나의 변천사를 웬만큼 아는 분이다. 최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냥 가진 것을 즐기고 누리면 되지 왜 자기 내면세계를 탐구하겠다고 애를 쓰느냐”고 물었다.

순간 조금 당황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방식을 궁리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삶의 숙제이자 어떻게 보면 가장 의미 있고 어려운 도전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옵션도 있었나? 나는 과연 왜 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타고난 성향도 있는 것 같다. 오래 전에 쓴 일기장을 들춰 보면, 상당히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인지 자문하고, 어른들 말씀을 받아 적고, 책에서 본 명언들을 옮기는 등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이 페이지마다 빼곡히 담겨 있다. 젊은 나이에 흔히 그러듯이 나 역시 위인들에 대한 책이나 영화를 보고 감명받아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을 기록하고 흉내 내 보던 기억들도 남아 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는 일찍부터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성인 군자들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게 삶의 비밀을 알려줄 수 있는 지혜를 찾기 위해 시작됐다. 그들은 무엇이 특별했을까? 정답을 알면 실수가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마치 삶을 입시 치르듯 대하고 가장 용하다는 족집게 강사와 명참고서를 찾았던 것이다.

마음공부를 하거나 도를 닦는다는 사람들도 그 길을 걷게 된 각자의 이유들이 있다.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지만, 무병장수나 성공 같은 세속적인 목표를 위한 경우도 있고, 아니면 사는 것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의 위안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경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한 능력을 구하고 있는 것이지 궁극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고는 볼 수 없다. 내면에서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의 주인공들이 무기를 장착하듯 자기는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능력이 추가로 생기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고 경험의 폭이 넓어지면서 이 여정은 진화한다. 진정한 지혜는 더 많은 능력을 장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놓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내 안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겸손함이 생긴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가능하다는 것도 차차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삶의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공부가 시작된다.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세상과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 변덕스러운 호불호의 너머에 있는 세상의 운동과 이치에 대한 공부가.

최근 3년 3개월간의 무문관 수행을 마친 스님에게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보낸 그 외로운 수행의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질문했다. 모든 것, 그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했다. 삶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고 무한한 자유와 기쁨을 알게 되었다고 답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의 여정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의 경이로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와 지혜는 이처럼 새로 눈을 떠야 생긴다고 한다. 살면서 할 수 있는 공부 중에 가장 어려우면서도 도전해 볼 만한 공부가 아닐까.

이지현
쥴리안 리 앤 컴퍼니 대표, 아르스비테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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