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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위장전입, 제대로 따져봅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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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사회2부장

이상언사회2부장

이미 정해져 있는 규칙도 과연 옳은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매번 그러면 피곤해서 살 수가 없지만, 규칙을 정언명령으로 여기면 발전이 없다. 초등학교 때 교실이 있던 건물의 중앙 현관은 선생님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건물 양쪽 끝에 있는 문으로 다녀야 했다. 운동장에서 놀다가 교실로 갈 때 시간을 줄이려고 중앙 현관으로 뛰어들 때마다 혼날까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학교(모교 아닌 다른 학교에도)에만 가면 옆문부터 찾는다.

일반고는 정부 돈으로 운영, 주민 자녀 우선 근거 약해 #일본에서도 폐지된 학군제가 범법자 유발 구조 만들어

위장전입은 공직자 인사 검증 때마다 불거지는 골칫거리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이낙연 국무총리와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도 여기에 걸렸다. 앞으로 다른 고위직 후보들도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광경이다.

그런데 아파트 분양이나 농지 보유 등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 학교 배정을 위한 것으로만 국한해 보면 ‘위장전입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에는 문제가 있다.

A라는 중학생이 집에서 먼 B고교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유는 ①B고교 졸업생들이 인기 대학에 많이 입학해서 ②원래는 B고교 근처에 살았는데 전셋값 상승으로 부모가 변두리로 이사를 갔고, 이런 상황에서 초등학교·중학교 친구들이 많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③아버지(또는 어머니)나 형(또는 언니)이 B고교에 다녔기 때문에 ④그냥 막연히 B고교가 좋아서 정도일 것이다.

A의 B고교 진학에 가장 좋은(확률이 높은) 방법은 가족 전체가 B고교 옆으로 이사 가는 것이다. 집을 사거나 임차를 해야 한다. 문제는 가정 형편이 이를 허락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이 경우에 합법적 시도는 ‘고교선택제’ 활용이다. 현재 서울에서의 일반고 배정은 3단계로 돼 있는데 1단계에서는 학군과 상관없이 입학 지원을 받아 정원의 20%를 뽑는다. 여기에서 경쟁률이 2대 1만 돼도 A가 원하는 대로 B고교에 진학할 확률은 10%에 머문다. 확률을 높이려면 가짜 주소지로 주민등록을 옮겨 2단계의 학군 내 배정(40%), 3단계의 통학 거리 중심 배정(40%)을 노리는 불법을 감행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도대체 왜 학교 배정에 ‘지리적’ 요소가 반영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인기 학군인 서울의 ‘8학군’ 내에 있는 일반고(공·사립 모두)들은 8학군 주민들이 낸 돈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서울시교육청에서 교사 인건비와 운영비 등을 받는다. 다른 학군의 일반고도 마찬가지다. 서울시교육청 전체 예산(올해는 8조1477억원) 중 55.1%는 중앙정부에서, 35.8%는 서울시에서 온다. 구청에서 오는 것은 없다. 절반 이상이 국민의 돈이고, 3분의 1 이상이 서울시민의 돈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이, 모든 시민이 서울의 모든 일반고에 자녀를 보낼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육 당국은 ‘통학 거리가 긴 것은 비교육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학부모나 학생이 선택할 문제다. 고교생쯤 되면 대중교통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통학하는 것은 큰일이 아니다. 교통 사정이 훨씬 안 좋았고, 학생들의 체력이 지금보다 나빴던 1960, 70년대에도 장거리 통학이 흔했다.

교육청의 학교 강제 배정은 ‘평준화’ 정책과 한 세트다. 평준화는 해당 지역 학교의 교사 수준과 교육 내용이 같거나 비슷하다(평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학교나 저 학교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까운 학교에 가면 된다는 논리다. 그런데 대다수 학부모나 학생은 동의하지 않는다. 평준화 신화는 이미 깨졌다.

학교는 평준화됐다→그러니 굳이 멀리 있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따라서 학교 배정은 거리 위주로 한다→이를 교란하는 위장전입은 나쁜 행위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위장전입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엄연한 불법이다. 따져 보고 문제가 있다면 규칙을 고치자는 얘기를 하는 것뿐이다. 학군제의 원조 격인 일본에서는 이미 학군이 사라졌다. 2003년에 도쿄가 폐지했고, 다른 지역들이 뒤따랐다. 우리만 꽉 붙들고 있다.

이상언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