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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대통령과 경총의 악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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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재계 이익을 대변하고 대(對)정부 압력단체 역할을 하는 곳들을 흔히 ‘경제단체’라 부른다. 핵심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 4단체’다. 여기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더하면 ‘경제 5단체’가 된다. 창립연도(1970년)가 가장 나중인 데다 ‘노사문제 전담’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탓인지 경총은 오랫동안 경제단체의 막내로 치부돼 왔다. 실제 해온 일도 임금 가이드라인 제시(1971년), 무노동·무임금 원칙 발표(1990년) 등 노조와 각을 세우는 게 많았다.

그런 경총이 문재인 대통령과 부닥치는 건 어쩌면 필연이었다. 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음에도 시위 경력을 이유로 판검사가 되지 못했다. 이후 부산에서 노동·인권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수백 건의 사건을 맡았는데, 승소율이 70%에 달해 노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첫 만남은 1990년이다. 부산 연합철강 노조가 남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쟁점은 단체교섭 체결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였다. 행정관청과 사측은 ‘회사와 노조 위원장이 합의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매수나 담합 우려가 있으니 조합원 투표에 부쳐 전체 노동자의 의견을 확인해야 한다’고 맞섰다. 노조 측 변호사 중 한 명이 문 대통령이었다. 평범한 사건으로 흘러가던 재판은 경총이 끼어들며 전국적 이슈가 됐다. 경총이 대법원에 ‘행정관청과 사측의 주장이 맞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보내 담당 재판부까지 전달됐던 사실이 드러났다. ‘재판 개입’ 논란이 일었고, 법원은 결국 노조 손을 들어줬다. 둘째는 참여정부 때다. 문 대통령이 참여했던 노무현 정부는 근로시간 단축과 비정규직 보호를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재계의 완강한 반대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때 경총이 앞장을 섰다.

최근 경총이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김영배 부회장이 “정부의 비정규직 해결책이 방향 착오”라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자 대통령이 직접 “양극화를 초래한 당사자로서 반성과 자성을 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간의 내력을 보면 결코 우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선수와 심판으로 쌓은 오랜 경험, 경제와 국가 안정에 대한 나름의 고민도 엿보인다. 하지만 세상사를 결정하는 건 당사자가 아닌 국민일 때가 많다. 앞선 두 번의 만남도 모두 시대정신과 여론이 승패를 갈랐다. 문 대통령이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지 지켜볼 일이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