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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편애 … 가족 간 소송 하루 7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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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호 01면

[탐사기획] 혈연이 해체된다 <상> 급증하는 상속 분쟁 

“엄마, 보고 싶었어.”

혈연 간 소송 판결 204건 #청구 원인 63%가 부모 편애 #형제자매 소송 후에 남남 돼 #부모세대는 장자상속 당연시 #딸들 권리 의식은 높아져 #정교한 유언장 등 대책 필요

큰딸이 내민 손을 어머니 A씨(78)는 끝내 뿌리쳤다. “소송은 제가 걸어놓고 이제 와서 난리야.” 눈물 흘리는 딸에게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내뱉은 뒤 애써 눈길을 외면했다. 2015년 말 서울가정법원의 한 법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2011년 사망한 B씨의 딸 3명은 장남과 어머니 A씨를 상대로 상속재산분할 심판을 청구했다. B씨 소유 2만4000㎡(약 7300평) 규모 과수원의 소유권을 장남에게 모두 주자는 상속합의가 부당하다는 취지였다. A씨는 재판 내내 “당연히 아들 것이지 출가외인이 왜 난리냐”고 말했다. 심리가 끝난 뒤 재판장이 딸을 안아주라 했지만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재판 관계자는 “딸은 오빠가 미워 소송을 냈지만 재판 내내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다. 재산을 나눠주는 걸로 결론 났지만 관계까지 회복시켜줄 순 없었다”고 말했다.

혈연(血緣)의 해체가 급증하고 있다. 부모·자식 간, 형제자매 간 벌어지는 소송 때문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자신의 법정 상속분의 절반도 못 받았을 경우 공동 상속인인 형제자매를 상대로 내는 유류분 소송은 지난해 1091건 접수됐다. 2006년만 해도 202건에 불과했으나 10년 새 다섯 배로 늘었다. 상속재산분할 심판 청구도 1223건 접수됐다. 주로 부모가 성년인 자식을 상대로 내는 부양료 소송도 270건 제기됐다. 합치면 총 2584건이다. 지난해 하루 7건꼴로 혈연이 해체된 셈이다. 서울가정법원 정용신 공보판사는 “이혼으로 인한 가족 해체에 이어 소송으로 인한 혈연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주로 부모의 상속재산을 두고 벌어지는 분쟁이 많다. 소송 과정에서 혈연관계는 남보다 못하게 돼버린다. 사회·경제적 분쟁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족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혈연 간 소송의 근본 원인은 부모의 편애(偏愛)다. 특히 남아선호 사상에 기반한 아들에 대한 집중적 지원과 불공평한 생전 재산 증여·유언이 부모 사후 혈연관계를 찢어 놓는 핵심적 원인으로 작동했다. 중앙SUNDAY는 지난해부터 올 4월까지 선고된 서울중앙지법 등 전국 12개 법원의 유류분 소송 판결문 107건, 서울·부산가정법원의 상속재산분할 심판 결정문 54건, 부양료 심판 결정문 43건 등 총 204건에 나온 청구 원인을 분석했다. 그 결과 63%에서 부모의 편애로 인한 문제가 발견됐다. 법무법인 지평의 상속·가사·가업승계팀 구상수 회계사의 설명이다.

“재산을 물려주는 입장인 70~80대는 남아선호, 장자 상속이 당연시되던 문화에서 살았다. 삶의 전 기간에 걸쳐 아들에게 교육비도 많이 투자했고 유학도 보냈고 사업비용도 보태줬고 증여도 많이 해줬다. 하지만 상속을 받는 50~60대, 특히 그간 차별받았던 딸들의 권리의식은 과거와 비교가 안 되게 향상됐다. 불공평한 그간의 처우에 대한 불만을 부모 사후 참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상담 고객 중엔 딸이 많은데 ‘그분은 내 부모가 아니다’며 분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이비붐(1955~63년생) 세대가 은퇴 시기에 접어들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점도 원인으로 거론된다. 국민연금연구원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 가운데 공적 연금을 포함해 어떤 연금도 없는 부부가 전체의 35%에 달했다. 은퇴를 앞둔 이들 세대에게 부모 상속재산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진다는 얘기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인 이현곤 변호사는 “경제 침체로 전통적인 가족과 혈연에 대한 가치보다 돈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예전엔 적당히 손해 보고 넘어갔지만 생활이 어려워지자 형제간 연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소송을 내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피상속인 세대(상속재산 원소유주)에서 유언장을 쓰는 등 자녀들 간 분쟁을 막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점 ▶부동산실명제·금융실명제 등이 도입되면서 부모의 과거 재산거래 내역 파악이 쉬워진 점 ▶가장의 권위와 장손의 지위가 약화된 점 등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전문가들은 위험 수위에 다다른 혈연 해체 현상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혈연 간 소송은 승패와 관계없이 당사자 모두에게 그 어느 소송보다 큰 감정적 상처와 후유증을 남기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세종 변희찬 변호사는 “부모가 남긴 재산이 믿고 의지할 혈연관계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재앙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유언장을 정교하게 작성해 분쟁의 소지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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