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없는 ‘영등포 정씨’ … 중국 동포들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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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조상이 물려주신 한국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중국식 이름이라니요.”

귀화할 때 ‘본관’ 증명자료 없으면 #국내 주소 등으로 새 본관 만들어

중국동포들이 구독하는 한민족신문의 전길운(55) 대표는 9년 동안 공공기관에서 ‘취안지윈’ 혹은 ‘콴지윤’으로 불렸다. 2014년 귀화가 허가돼 주민등록증이 나오기 전까지 자신의 신분증 역할을 하는 거소신고증에 ‘QUAN JIYUN’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전길운’의 중국식 발음(취안지윈)을 영문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는 21일 “중국동포 사회에서는 이름 때문에 한숨짓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며 “신문사로 들어오는 이름 표기 관련 민원만 한 달에 12건이 넘는다”고 말했다.

전 대표가 국적을 취득하기 전 사용하던 거소신고증. 김나한 기자

전 대표가 국적을 취득하기 전 사용하던 거소신고증. 김나한 기자

2014년 국적을 취득한 남명자(60)씨는 “귀화하기 전 관공서나 병원에 가서 한자 이름을 써 거소신고증을 내면 꼭 한글 이름을 다시 물었다. 그리고 내 발음을 듣고 마음대로 썼다”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라고 읽는 걸 동포는 ‘리’라고 읽는 경우 등이 있어 아예 영문으로 표기한다”고 설명했다.

귀화 후 주민등록증을 받더라도 중국동포들은 또 다른 차별을 받는다. 중국동포들은 국내에 5년 이상 체류 등의 조건을 갖추면 귀화할 수 있다. 한데 이들의 주민등록증에는 이름이 한글로만 표기돼 있다. 보통 주민등록증에는 한글 이름 뒤에 괄호를 치고 한자 표기를 함께 한다. 2004년 국적을 취득한 강생금(60)씨는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내밀면 괄호 안 한자가 없는 것만 보고도 직원이 ‘아 동포분이시죠?’라고 묻는다. 내가 이 사회에서 분리돼 있다는 느낌을 그때 받는다”고 말했다. 주민등록증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자치구 관계자는 “중국식 한자와 우리나라 한자가 다른 부분도 있어서 한글 이름만 표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 대표가 서울 남부지법에서 받아온 본 창설허가신청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본의 예시로 '구로''금천''영등포' 등을 들고 있다. 김나한 기자

전 대표가 서울 남부지법에서 받아온 본 창설허가신청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본의 예시로 '구로''금천''영등포' 등을 들고 있다. 김나한 기자

가문의 시조를 나타내는 성씨의 본관(本貫)은 행정당국도 난감해하는 중국동포들의 애환이다. 중국동포들은 대부분 자신의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은 본관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를 증명할 족보는 없는 경우가 많다. 법원 관계자는 “족보가 없이 본관을 인정해주면 해당 가문에서 항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난감해했다. 법원에서는 족보가 없는 경우 자신이 특정 본관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미 있는 본관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영등포 정씨’ ‘구로 김씨’ 등 거주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추천한다.

이진영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중국동포가 80만 명을 넘었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일체감을 느끼고 적응하도록 행정적으로 최대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나한 기자 kim.na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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