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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서 "키스할 수 있어?" 묻는 선배…대학 내 성폭력, 왜 자꾸 되풀이될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5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캠퍼스에는 ‘OO학과 부회장의 사퇴를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에 따르면 지난달 18일 새벽 이 학과 부회장 A씨는 남ㆍ녀 후배 각 1명과 술을 마시다 “(얼굴을 가까이하며) 나랑 15분 정도 키스할 수 있어?”, “(OO과는 가족과 같다는 말에) 가족인데 한 번 잔다고 뭐가 달라지나” 같은 발언을 했다.

지난 15일 고려대 서울캠퍼스에 붙은 성폭력 고발 대자보. [사진 페이스북 페이지 '정대후문 게시판']

지난 15일 고려대 서울캠퍼스에 붙은 성폭력 고발 대자보. [사진 페이스북 페이지 '정대후문 게시판']

대자보가 논란이 되면서 학생 한 명이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피해자는 “성희롱 사건이 가족과 지인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며 신고 취소를 요구했다. 해당 학과 학생회는 경찰 신고를 한 학생의 행위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라며 공개 사과문을 쓰라고 나섰다. 신고 학생은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해 신고는 취소했지만, 범죄 사실을 신고하는 건 시민의 의무다”고 주장했다.

사건 장소와 공론화 방식, 이어진 ‘2차 피해’ 논란까지…. 이번 ‘대자보 사태’는 대학 내 성폭력 문제의 여러 단면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에 의뢰해 발표한 ‘대학 성폭력 피해자 지원 및 사건처리 현황’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전국 95개 대학에서 연평균 2.48건의 성폭력 신고가 접수됐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2009~2011년 평균 신고건수 0.87건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였다.

가장 빈번한 사례는 선ㆍ후배간 성폭력이었다. 주로 술자리나 MT, 단체 카카오톡방 등 대학생들의 일상과 밀접한 장소에서 발생했다. 2015년 2월 남학생들이 같은 과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음담패설을 한 사실이 공개된 ‘국민대 단톡방’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해와 올해 초 서강대ㆍ서울대ㆍ연세대 등 대학교 단체 카카오톡방 성희롱 문제가 연이어 불거지고 있다. 지난달엔 한양대 공과대 16학번 남학생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뒤풀이 자리에서 동기ㆍ후배 여학생들을 음식에 비유하는 등 성적인 농담을 한 사실이 학내 대자보를 통해 알려졌다.

대학 내 언어 성폭력은 공론화 여부만 다를 뿐 예전부터 있었다. 회사원 한모(30ㆍ여)씨는 “대학생 때 술을 마시거나 MT에 갔을 때 성적인 농담을 하거나 터치하는 선배들이 있었지만 그런 상황이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는데다 괜히 문제제기를 했다가 ‘예민한 사람’으로 찍힐 거 같아 그냥 넘기곤 했다”고 말했다. 학생회 활동을 하다 5년 전 대학을 졸업한 이모(33)씨도 “대학에도 학번이라는 서열과 단합을 강요하는 문화가 있어 피해를 입어도 ‘단체를 위해’ 입을 다무는 일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인권의식에 대한 기본 교육이 잘 안 돼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있지’‘별거 아니잖아’ 같은 시각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고 이것이 성폭력 문제를 키워온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대학별 익명 글을 올리는 ‘대나무숲’ 페이지가 생기고 학내 대자보 문화가 부활하면서 성폭력 문제는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는 추세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1~2년 전부터 SNS 등 새로운 창구를 통해 일상에서의 성폭력 사례들이 공유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게 나만의 일이 아니다’는 동료 의식이 생겼다. 이 의식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 과정에서 제3자에게 피해자의 신상이 공개되는 등 ‘2차 피해’ 또한 존재한다. 고려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미경 소장은 “성범죄 친고죄가 폐지돼 고소를 취하해도 수사가 계속되기 때문에 성폭력 신고를 하기 전,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어야 할 부분들을 고려해 피해자 동의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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