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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노는 동네 거실 갯벌처럼 소중한 공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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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호 23면

[도시와 건축] 골목길

과거 골목길은 동네 아이들이 뛰놀고 아주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에 비친 골목길 풍경. [중앙포토]

과거 골목길은 동네 아이들이 뛰놀고 아주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에 비친 골목길 풍경. [중앙포토]

과거 강북의 골목길은 사람이 정주하는 공간이었다. 동네주민의 거실이라고 할 만큼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공간이었고,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콩나물을 다듬고 할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는 장소였다. 골목길은 무엇보다도 ‘자연이 있는 외부공간’이다. 골목은 하늘이 보이고, 날씨와 시간에 따라서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고, 1년 365일 24시간 달라지는 자연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달라지는 자연 만나는 외부공간 #아파트·자동차에 밀려 사라지는 중 #현대인, 사적인 외부공간 더 찾지만 #인간 중심 골목길 시대 맞게 보존을

하지만 그런 골목길이 1970년대 ‘마이카’시대가 열리면서 공간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69년 10만 대 정도였던 우리나라 자동차 대수는 2014년에 2000만 대를 돌파했다. 자동차가 길에 쏟아지면서 사람들이 느리게 사용하던 골목길에 자동차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과거에 집이라고 하면 일·이층짜리 단독주택들을 이야기했다. 당연히 마당이 있고 집 옆에는 골목길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에 전체인구의 5.2%였던 아파트거주인구가 2015년에는 60%로 치솟았다.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집 앞에 골목길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대신 복도와 계단실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골목길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도시 공간은 사람 중심에서 자동차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남아 있는 골목길도 그 성격이 바뀌었다. 우선 걸어 다닐 때 사람은 골목길을 많이 점유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동차는 폭이 약 2m, 길이가 5m 정도가 된다. 자동차가 한 대라도 지나가거나 주차되면 골목길의 공간을 상당부분 차지하게 된다. 속도 면에서 사람은 시속 4㎞로 걷는 반면 자동차는 그보다 10배는 빠르게 다닌다. 과거 아이들이 엎드려서 놀고 숙제하던 골목길 공간은 지금은 뚱뚱한 자동차가 차지하고 앉아 있다. 골목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정주하는 공간이 됐다. 골목길이 사라지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변화일까. 정량적으로 한번 살펴보자.

교통수단 차이가 만든 도로망 크기

뉴욕·강남·로마의 주요 도로망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보았다. 뉴욕의 한 블록의 크기는 평균 가로 320m, 세로 80m이다. 서울 강남의 블록 크기는 가로 800m, 세로 800m 정도가 된다. 로마의 경우에는 한 블록의 크기가 가로 80m, 세로 70m이다. 한 블록의 크기는 로마보다 뉴욕이 4배가량 크고, 서울은 10배가 크다. 이렇게 다른 크기의 블록이 형성된 데는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교통수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로마가 만들어진 시대는 대부분이 걸어 다니던 시대이다. 시속 4㎞로 로마의 한 블록인 80m를 걸으면 72초가 소요된다. 뉴욕이 만들어진 시대의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였다. 시속 20㎞ 정도 속도의 마차를 타고 뉴욕의 이쪽 사거리에서 저쪽 사거리까지 이동을 하면 약 58초의 시간이 소요된다. 서울 강남은 자동차 시대에 만들어진 거리이니 시속 60㎞의 자동차로 다니면 한 블록을 통과하는데 48초가 걸린다. 도시의 블록 크기는 크게 차이가 나지만 시간거리로 계산을 하면 블록의 크기는 대체로 1분 내외의 시간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도시는 이렇게 교통수단에 맞추어서 비교적 균질한 시간거리의 규모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로마와 은평구의 골목길을 비교해보자. 조사 방식은 같은 거리의 길을 걷는 동안 갈림길이 나오는 빈도를 비교해 보았다. 로마는 사진(아래)과 같이 10분 정도를 걷는 길이인 약 650m를 걷는 동안 갈림길이 나오는 지점이 7개이다. 각 지점 간의 평균거리는 80m 정도이고 지점 간 이동하는 평균시간은 72초 정도이다. 같은 방식으로 은평구의 골목길을 조사해 보았다. 610m 걷는 동안 갈림길이 나오는 지점은 15개이다. 지점 간의 평균거리는 37m이고 지점 간 이동하는 평균시간은 33초이다. 은평구의 골목길은 로마의 골목길보다 2배 정도 높은 빈도수로 자주 갈림길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수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풍경 다양한 북촌·삼청동 골목길

테헤란로의 공간은 브로드웨이에 비해 3배 가까이 크다. 테헤란로를 걸으며 소외된 느낌이 드는 이유다.

테헤란로의 공간은 브로드웨이에 비해 3배 가까이 크다. 테헤란로를 걸으며 소외된 느낌이 드는 이유다.

아는 어르신이 금요일마다 마포구에서 압구정동까지 3시간 반 정도 걸어서 퇴근하시는 분이 계셨다. 어느 날 그분이 필자에게 “걸어서 퇴근할 때 어느 구간이 제일 힘든지 아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분의 대답은 ‘마포대교 위’가 가장 힘들다는 것이었다. 마포대교를 건너려면 약 20분가량 걸리는데 걷는 내내 장면이 하나도 안 바뀌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거리는 왜 더 걷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걷고 싶은 환경이 되려면 풍경이 바뀌어야한다. 그 풍경은 다양한 가게일 수도 있고 샛길로 나오는 다른 길의 풍경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 강남에서는 잘 안 걷게 되어도, 걸으면서 자주 다른 길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뉴욕이나 로마에 가면 더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강북의 북촌이나 삼청동 같은 골목길이 많은 곳은 걸으면서 만나는 다른 골목길의 우연한 풍경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걷기를 즐긴다. 촘촘한 도로망은 좀 더 인터랙티브한 환경을 만든다. 우리의 골목길은 로마의 골목길보다도 풍경변화의 밀도가 2배나 높은 길이다. 골목길은 사람이 다니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사람 중심의 모듈러 길이다.

이번에는 뉴욕·강남·로마의 길의 단면을 한번 비교해 보자. 맨해튼 브로드웨이의 단면은 주변에 17층 정도의 빌딩이 들어서 있다고 보면 그래픽(왼쪽)처럼 길의 단면적은 약 1000㎡ 정도가 된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단면의 면적이 0.7㎡ 정도라고 본다면 브로드웨이의 길의 공간은 사람의 약 1500배 정도가 된다. 같은 방식으로 강남 테헤란로를 비교해 보면 단면이 사람에 비해서 4000배 정도로 크다. 우리가 테헤란로를 걸으면서 스케일적으로 소외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로마의 경우에는 사람의 130배 정도 크기의 공간단면을 가진다. 은평구의 골목길은 사람의 70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골목길을 걸을 때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골목길의 공간의 크기가 사람보다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테헤란로를 걸으면 황량한 느낌이 드는 반면 골목을 걸으면 우리는 심리적으로 건축물이 우리를 포근히 안아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은평구의 골목길은 로마에 비해서 절반 정도의 스케일 감을 가진다.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골목길은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진 다양한 체험이 있는 길이고 휴먼스케일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골목길은 소중한 건축·자연유산

서울 은평구 골목길은 로마의 골목길보다 2배 정도 높은 빈도로 갈림길이 나온다. 풍경이 자주 바뀌는 길이 더 걷고 싶은 길이다.

서울 은평구 골목길은 로마의 골목길보다 2배 정도 높은 빈도로 갈림길이 나온다. 풍경이 자주 바뀌는 길이 더 걷고 싶은 길이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인간 중심의 골목길 공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도시계획자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구릉 지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군락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휴먼스케일의 자연을 품은 외부공간이 많았다. 집집마다 작지만 마당이 있었고 골목길이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고밀화되어야 하는 필연적 이유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은 대부분 다세대 주택으로 교체되면서 마당이 멸종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휴먼스케일의 외부공간은 골목길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점차적으로 자동차에 점령되었고 그 맛과 멋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골목길은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환경이 서식하는 갯벌과도 같은 존재이다. 반면에 재개발을 통해서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간척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땅을 만들기 위해서 갯벌을 매우고 간척사업을 했다. 지금은 자연의 보고인 갯벌 대신 간척지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선택이지 알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도시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갯벌과 같은 골목길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갯벌의 생태계처럼 오랫동안 사람의 생활을 거치며 만들어진 골목길을 필요한 부분은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있는 골목길을 그 모양 그대로 유지를 하고 자동차를 다 없애면 예전의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순진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지금 와서 골목길을 유지한다고 해서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공동체처럼 가족 같은 이웃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인 이안 모리스는 『가치관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에너지를 취하는 경제시스템이 가치관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농경사회는 집단으로 노동을 해야 한다. 이들은 모내기나 탈곡을 같이 한다. 그 시절에는 냉장고도 없어서 먹고 남는 것은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부족할 때 이웃으로부터 음식을 나누어 받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시스템과 기술수준에 의해서 농경시대의 우리는 이웃과 공동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80년대 중반까지는 농경사회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필자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셨던 분이다. 그러다 보니 서울로 와서도 이웃과 친밀하게 지내셨다. 그러나 현대는 이웃집 사람과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진다. 냉장고가 있어서 남은 음식은 보관했다가 먹어도 된다. 이웃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층의 사람과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럽다. 같은 사람이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더욱 개인주의적으로 되었다.

골목길이 있는 주택가에서 살아도 예전의 농경시대 같은 지역공동체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은 내 신분이 드러나는 골목길보다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쇼핑몰이나 공원 같은 대형 공공공간이 편하다. 어쩌면 현재 우리에게는 골목길 보다 마당·발코니·테라스 같은 사적인 외부공간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골목길은 자연을 만날 수 있고 인간을 덜 소외시키는 우리가 물려받은 건축유산이자 자연유산이다. 이 골목길을 이 시대에 맞게 어느 정도 보존해야 하며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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