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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공정위장 등 줄사표 … 되풀이되는 임기제 무용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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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임종룡 금융위원장,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성영훈 국민권익위원장.

새 정부 출범 앞서 사표 제출 관례로 #원칙적으로 임기 보장이 맞지만 #“새 대통령과 철학 차이 크다면 #스스로 사표 내는 게 맞다” 현실론 #“직위별 임기제 원점서 재검토를”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인사혁신처에 사표를 제출한 장차관 40여 명에 포함된 ‘합의제 행정기관’인 위원회의 위원장들이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전 정부에서 임명된 위원장들이 사표를 내는 건 그동안 관례였다. 이들의 사표를 수리할지는 문재인 대통령이 결정한다. 각 위원회 내부에서는 이미 사표 수리 여부보다는 차기 위원장으로 누가 올지에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런데 원칙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른 부처 장관과 달리 이들은 모두 법적으로 3년 임기가 보장되는 임기제 정무직이다. 임종룡 위원장은 내년 3월까지 10개월 임기가 남았고 정재찬 위원장은 7개월, 성영훈 위원장은 내년 말까지 1년7개월 임기를 남겨뒀다. 이 외에 방송통신위원회(현재 위원장 공석), 국가인권위원회(이성호 위원장), 원자력안전위원회(김용환 위원장)도 위원장의 임기가 3년으로 정해져 있다.

중앙 행정기관의 지위를 갖는 이들 6개 위원회는 장관 한 사람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독임제 부처와 달리 복수의 구성원(위원)이 협의·심의·의결을 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합의제 행정기관’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 중 금융위·공정위·권익위·원자력안전위는 국무총리실 직속, 방통위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다. 인권위는 따로 소속되는 곳이 없는 무소속 위원회다. 금융위원장과 공정위원장은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국무회의에 배석한다.

위원장의 임기를 법률로 보장하는 건 정권의 성격이나 정치적 이유로 위원회 본연의 역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논리 때문이다. 법에 따르면 이들은 금고 이상의 형벌을 받거나 장기간 심신쇠약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때를 제외하고는 의사에 반해 면직할 수 없다. 위원장이 아닌 위원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황교안 전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이 임명한 김용수 방통위 상임위원은 임기가 2년11개월이나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법조문에만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역대 17명의 전임 공정거래위원장 중 3년 임기를 채운 건 단 한 명, 노무현 정부의 강철규 위원장(2003년 3월~2006년 3월)이 유일했다. 금융위도 과거 금융감독위원회 시절인 윤증현 위원장(2004년 8월~2007년 8월)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여타 다른 장관들처럼 공정위·금융위·방통위원장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상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임기제가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만 야기”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기술직 직원들과 식사하기 위해 청와대 비서동인 여민관 식당에서 식판에 음식을 담고 있다. 이 건물은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여민관(與民館)’으로 불렸으나 이명박 정부 때 ‘위민관(爲民館)’으로 바꿨다. 문 대통령은 이날 위민관을 여민관으로 바꿔 부르라고 지시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기술직 직원들과 식사하기 위해 청와대 비서동인 여민관 식당에서 식판에 음식을 담고 있다. 이 건물은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여민관(與民館)’으로 불렸으나 이명박 정부 때 ‘위민관(爲民館)’으로 바꿨다. 문 대통령은 이날 위민관을 여민관으로 바꿔 부르라고 지시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김영우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치적 중립 등의 이유로 임기제를 채택했지만 실제로는 사문화됐고 무용지물”이라며 “오히려 임기제가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만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인 2013년 2월에도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김석동 금융위원장,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 이계철 방송통신위원장은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그래도 법에서 정한 임기인데,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국민의 뜻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위해서라도 임기 중 교체는 불가피할까. 이를 둘러싼 논란은 이미 2007년 말~2008년 초 뜨겁게 일었다.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가 만료된 직위를 새로 임명하자 당시 인수위원회가 공개적으로 “임기제 고위직 인사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인사를 자제해 왔는데 한 번 더 그런 얘기가 나오면 사람을 모욕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임기제 도입 취지와 외국 사례 등을 볼 때 원칙적으로 임기직은 법령상 정한 임기를 지키도록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MB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중앙부처 1급과 공공기관장의 일괄 사표를 받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다시 정권이 교체된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반대편 입장에 서게 됐다.

"유임이든 교체든 국민이 공감할 수 있어야”

법률에 정한 원칙대로 전 정부의 임기제 고위직의 임기를 반드시 보장해줘야 한다는 원칙 우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큰 편은 아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임기제 위원장이니 무조건 임기를 지키라고 하기는 어렵다”며 “다만 문 대통령이 공정과 정의, 통합을 강조했으니 국정철학과 어긋나지 않는 인사라면 유임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대신 유임이든 교체이든 국민이 그 결정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청와대 인사수석을 지낸 정영애 서울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금은 10년 만의 정권 교체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임기 보장이란 원칙 사이에서 가르마를 잘 타야 한다”고 말했다. “임기직에 압력을 가해서 물러나게 하는 건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새 대통령과 철학의 차이가 크다면 스스로 사표를 내는 게 맞다”는 현실론이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임기제 고위직 전반에 대한 재검토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미국의 경우 독립 규제기구인 연방거래위원회나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에 대해서는 소추나 개인 사정이 없는 한 정부 교체 시에도 임기를 보장한다. 국내에서도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독립성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김대중 정부 이후 모든 한은 총재가 4년 임기를 채웠다.

김영우 교수는 “직위별로 임기제가 필요한지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해서 정리하고, 임기제로 가기로 결정했으면 이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영애 교수도 “통치철학을 반영해야 하는 직위라면 차라리 임기제를 없애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를 자유롭게 하고, 반대로 독립성이 중요한 자리는 임기를 확실히 보장해줘서 정권 눈치 볼 필요 없이 소신껏 일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애란·장원석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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