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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지은 이유를 새겨 듣기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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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호 14면

문자권 별 공책 공간 구획.로마자 문자권의 1차원 선형적인 4선 알파벳 쓰기와 5선 악보 공책.한글 문자권의 2차원 정방형적인 글씨연습, 글짓기, 한자 연습 공책.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모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일본 가나 문자권의 공책들.

문자권 별 공책 공간 구획.로마자 문자권의 1차원 선형적인 4선 알파벳 쓰기와 5선 악보 공책.한글 문자권의 2차원 정방형적인 글씨연습, 글짓기, 한자 연습 공책.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모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일본 가나 문자권의 공책들.

나는 ‘세종’이라는 묘호(廟號)로 그대들에게 익숙할 것입니다. 나는 145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대와 후대의 숱한 기록과 기념물들 속에 남겨져 있어, 후손들의 기억 속에 존재를 이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15세기에 중세 한국어를 쓰던 내가 지금 이렇게 현대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은, 한 21세기의 한국인이 본인에게 익숙한 언어로 나를 전달하고 있어서입니다.

유지원의 글자 풍경 : #한글 디자이너 이도가 말한다

문자권마다 글자를 둘러싼 공간의 관념이 다르다

나는 조선의 네 번째 왕입니다. 그대들과는 문화와 기술도, 세계관도 다른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1397년 생으로, 내가 태어나기 5년 전만 해도 한반도를 지배한 왕조는 고려였습니다.

나는 새 국가 조선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복잡한 사회를 조직하고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는 데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공간을 패턴화하는 틀을 제공하는 것은 수학입니다. 하여 나는 수학을 배웠습니다. 제도를 정비하고 양을 측정하려면 단위가 통일되어야 합니다. 단위를 표준화하는 도량형 정비에 힘을 쏟는 데에도 나는 수학적 인식의 틀에 힘입은 바 큽니다.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 역법체계인 칠정산,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음의 지속시간을 양으로 표기한 악보인 정간보 등이 내 통치 하에 발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연속적인 시간의 개념을 단위로 분절해서 눈에 보이는 공간에 체계적으로 ‘번역’하는 훈련을 평생에 걸쳐서 한 셈입니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 마침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이 모든 업적들을 집대성한 과업이었습니다.

한글의 발명 역시 시간과 청각 영역의 한국어 소리들을 분석해서, 이를 공간과 시각 영역의 문자체계로 ‘번역’한 일입니다. 나는 언어학을 잘 알고 있었고, 집현전의 학자들은 당대에 접근 가능한 사방의 언어와 문자들을 리서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학의 영역에만 머무르지는 않는 종합적인 성취였습니다.

나는 한글을 모아쓰기하도록 했습니다. ‘글’이라는 단어에서, ‘글’은 음절이고, 한 음절은 초성 ‘ㄱ’, 중성 ‘ㅡ’, 종성 ‘ㄹ’의 세 음소로 나뉩니다. 이것을 ‘음절삼분법’이라고 합니다. 서구의 로마자는 음소들을 ‘ㄱㅡㄹ’처럼 일렬 배열합니다. 중국의 한자와 일본의 가나 문자는 음절 ‘글’을 음소 단위로 쪼개지 않습니다. 한글은 모아쓰기를 함으로써 로마자같은 음소문자와 한자같은 음절문자의 성격을 모두 가집니다.

한글 모아쓰기는 타자기 이후 컴퓨터와 모바일 환경에서 한글 입력방식을 개발하는 데에 큰 난제가 되고 있습니다. 음소들이 로마자처럼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와 세로의 2차원 두 방향으로 교차해서 진행해가니까요. 그렇다고 풀어쓸 수도 없습니다. ‘ㄱㅡㄹ’이 ‘글’보다 그대들에게 불편한 것은, 익숙함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음절이 대체로 하나의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지각되는 한국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음소의 개념을 발견해내고도 굳이 모아쓰기를 해서 음절문자로 돌아간 것은 한자의 영향이라거나 언어학적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한글을 발명한 15세기 전통사회 조선에서는 2차원 정사각형을 공간의 기본 단위로 인식했습니다. 이런 공간 관념으로부터 조선의 토지와 마을, 도시와 가옥, 그리고 일상의 여러 공간들이 사각형 단위로 구획되었습니다. 한글은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발명된 글자입니다.

글자는 환경에 반응하며 진화한다

1 로마자, 띄어쓰기와 문장부호, 한자, 한글의 공간. 로마자는 색으로 표시한 공간의 면적을 항상 균등하게 한다. 한자와 한글은 공간을사각형으로 구획한 후 그 한 가운데에 한 음절의 글자를 넣는다.

1 로마자, 띄어쓰기와 문장부호, 한자, 한글의 공간. 로마자는 색으로 표시한 공간의 면적을 항상 균등하게 한다. 한자와 한글은 공간을사각형으로 구획한 후 그 한 가운데에 한 음절의 글자를 넣는다.

글자는 환경에 반응하면서 진화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 디지털 시대의 글자 환경은 내가 조선 왕조에서 한글을 발명하던 당시 글자 환경과 다릅니다. 글자는 기술적 환경에 반응하고, 타문화와의 교류 속에 변모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사회 속에서는 글자 환경을 그에 맞게 적절하게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대들이 날마다 한글을 사용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환경을 비롯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보이지만, 한 가지 간단한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그림일기의 바둑판형 글자 구획은 오늘날의 어린이들이 올바른 글자 공간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적절치 않습니다. 한 글자씩 써서 넣는 연습을 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글을 짓고 문장을 쓰기에는 부적당합니다. 이미 한글 문자 생활의 일부가 된 띄어쓰기나 문장부호 같은 외래적인 요소들이 전체 글자 공간의 성격을 재편성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림의 예에서, 공책의 격자를 덜어내어 보면 글자들의 관계가 얼마나 비논리적인 공간 속에 설정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이해하고서, 주변의 글자 환경을 조금만 조정해주어도 모든 어린이가, 모든 국민이, 한글을 훨씬 편안하고 아름답게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2 위: 초등학생 그림일기와 한글 글자 연습 공책 아래: 한글 문장을 쓸 때는 공간을 재구성해야 한다.

2 위: 초등학생 그림일기와 한글 글자 연습 공책 아래: 한글 문장을 쓸 때는 공간을 재구성해야 한다.

便於日用耳(날마다 쓰기에 편하도록 할 따름이다)

다가오는 5월 15일은 내가 태어난 날입니다. 나를 겨레의 스승으로 기려 그날을 스승의 날으로 제정했다고도 합니다. 나를 스승으로 섬기려거든 내 뜻을 몇 가지 헤아려주기 바랍니다.

첫째, 나는 15세기 조선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내가 대한민국 군주였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들의 글자 환경에 꼭 맞도록 한글의 공간 관념을 정비하지, 수백여 년 전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둘째, 구태는 의연히 떨쳐내십시오. 전통을 존중하고 숙지하되, 옛것이라도 오늘날의 일상에 실용적으로 쓸 때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널리 도모하도록 합리적이고 다각도로 접근하십시오.

셋째, 자주적이되 배타적이지 마십시오. 문화란 교류하는 것입니다. 공존을 모색하고, 우리화한 외래 요소는 우리에게 맞게 정비해야 합니다. 내가 한글을 창제한 것은 한자를 더 잘 포용하고자 한 것이지 배척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넷째, 내가 거처하며 국사를 돌보던 경복궁 뒤로, 대한민국 국가 원수의 관저에 곧 새 인물이 든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분이든 헤아려주십시오. 내가 무엇 때문에 글자를 발명까지 해야했는지. 억울한 일을 겪어 가슴 속에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소통이 되지 않아 갑갑함에 눈물 흘리는 국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뜻을 새겨주기를, 한글을 쓰는 후손 모두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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