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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회장의 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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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앙일보 창립자이며 우리 나라 최대 기업의 창업자인 이병철회장의 별세는 반세기에 걸쳐 한국 경제 발전사와 발자취를 함께 해온 불세출의 경영인이라는 점에서 새삼 그의 교훈적 생애를 되돌아보게 한다.
191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38년 삼성상회를 설립, 기업가로서 뜻을 세운 이회장은 무역업에서 중화학, 첨단기술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근대산업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가 일으킨 삼성은 년간 총매출액이 14조6천억원에 달하며 이것을 부가가치로 환산하면 GNP(국민총생산액)의 3.8%를 차지할 만큼 큰 비중이다.
삼성을 통해 납부되는 년간 세금만 해도 총 조세의 5.4%를 차지한다.
삼성그룹에 종사하는 인원은 무려 15만명을 헤아리며 자회사, 납품회사의 고용효과까지 감안하면 그 기업가족은 1백만명을 추산하고도 남는다.
삼성그룹의 86년도 수출실적은총 85억6천만달러였으며 이것은 우리 나라 총수출실적의 24.6%에 버금 한다.
그뿐 아니라 삼성은 세계유수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적 신인을 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이 되었다.
이회장은 경제적 후진국의 환경에서, 근대적 기업경영의 불모지였던 한국 땅에서 50년 풍상과 한국동란 등 파란곡절을 극복하며 오늘의 바로 그 삼성을 일으켜 세웠다.
이것은 오로지 이회장 특유의 강인한 경영자적 기질과 백절불굴의 기업정신에 힘입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회장은 탁월한 경영인으로 평소 몇 가지 남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로 이회장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새로운 사업을 착안할 때도, 그 사업을 성공의 궤도에 올려놓을 때도 언제나 그는 분명한 명분과 일관된 원칙을 제시했다. 큰 뜻을 품으면 반드시 실천에 옮겼고, 사후관리에도 빈틈과 한가함이 없었다. 이회장은 원칙주의자이면서 또한 완전주의자이기도 했다.
중앙일보를 창설할 때도 그는 『확고한 기업적 토대 위에서의 건전언론』을 경영원칙으로 제시하고 실천했다. 경영의 기반을 갖지 못하는 언론은 그 표방이 아무리 엄숙해도 대경대도를 걸어가기 어렵고 도덕적으로 건전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지론이자 언론관이었다.
기업의 경영에 있어서도 이회장은 『기업의 적자경영은 사회적 죄악이다』는 신념을 버린 일이 없었다. 기업의 본령은 각고의 노력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우리 사회에서 무분별한 기업들이 부실경영으로 쓰러지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보고 있는 일이며, 그 사회적 손실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둘째로 이회장은 용인의 달인이었다.
『내 인생의 80%는 인재육성을 위해 바쳤다』고 할 정도로 그는 인재를 아끼고 또 키웠다.
삼성의 성장사는 곧 인재의 성장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생전에 적성을 다해 설립한 사원연수원은 그 규모나 운영에 있어서 가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권위와 신망을 갖는 비즈니스 스쿨이다.
이회장은 인재를 발굴하는 노력 못지 않게 인재를 육성하는 일에도 정성을 쏟았다. 기계는 쓰고나면 닳아지지만 인재는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키우면 키울수록 쓸모 있게 커진다는 것이 그의 인재관이었다.
세째로 이회장은 사업보국의 신조에 철저했다. 그는 상업자본가로서 무역업에서 출발, 중화학과 생필품 산업을 일으킨 산업자본가로 변신, 만년엔 고희에도 마다 않고 국가백년의 대계를 내다보는 첨단기술 산업의 개척자로서 열정을 쏟았다.
기업인은 기업을 건실하게 운영해 국민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고, 값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해 국민경제를 안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출의 증대로 국제수지의 흑자기조를 만들어 국부를 쌓고, 그 과정에서 얻은 이익은 성실하게 세금으로 납부하면 그것이 바로 기업이 할 일이요, 책임이고, 사명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네째로 이회장은 앞을 내다보는 선견력과 결단력이 있는 미래지향적 선각자였다. 그의 옆엔 언제나 신간서적과 잡지와 각종 보고서들이 산적해 있었고, 사생활 중에도 VTR를 통해 가치 있는 지식, 최신의 세계정보에 끊임없이 접하며 세계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했다.
이회장은 세계의 진운이 아시아로 집중하는 천하의 대세에 주목하며 21세기는 태평양시대임을 확신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세대는 국민의 에너지와 국가적 저력, 그리고 5천년 역사를 이끌어온 강건한 민족의 잠재력을 일깨워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적극적인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우리가 오늘에 자족하며 정체에 머문다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도 했다.
이회장이 만년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반도체, 전자 등 첨단산업분야와 종합기술연구원의 설립도 그런 포부와 이상, 그리고 의욕을 담고 있었다. 부존자원 없는 나라가 밖으로는 외채를 갚고, 안으로는 부국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라고 믿고 그는 누구보다 앞서 수범했다.
다섯째로 이회장은 문화진흥인으로서도 큰 몫을 했다. 그가 설립한 호암미술관은 사립으로는 동양최대의 규모일 뿐 아니라 여기에 수장한 미술품들은 동난 중 버려지다시피 했던 문화재들을 수집한 것들이다. 이회장은 그런 인연으로 문화계 각방면에 음양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인의 일대기는 이처럼 그 면면이 장엄과 생기발랄함으로 넘치고 그 창의력과 의지력, 그리고 신념에 찬 결단력은 후세인들에겐 값진 경세훈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게 삼성그룹은 창업주 개인의 기업이라고 하기엔 그 사회적 기여도와 역할, 그리고 책임이 너무도 막중해졌다.
비록 삼성의 창업주는 타계의 몸으로 상징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기업들은 국민경제를 담는 큰그릇으로, 아니 그것을 이끄는 큰 수레로 흔들림 없이 발전해야 할 것이다.
삼성은 다행히 경영의 공백과 단절 없이 고인의 확고한 견지에 따라 승계자가 결정되고 새로운 리더십이 확립되었다.
인걸은 천수에 따라 가게 마련이지만, 그릇이 큰 인물일수록 후인들은 그 유덕과 유업을 기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긍지와 사회적 책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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