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한류의 진정한 위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문화부장

양성희문화부장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얘기겠지만 한국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구린 취향’쯤으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대학생이나 식자층은 팝을 듣고, 뽕짝 같은 가요는 시장통 음악쯤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냐 싶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당시 대학에 다니며 극장에서 본 한국영화는 손가락에 꼽을 지경이다. 한국영화는 늘 외화의 뒷전, 외화보다 하수였다. 88년 할리우드 배급사 UIP가 ‘위험한 정사’로 국내 직배를 시작하자 한국영화가 다 죽는다고 생각한 충무로 영화인들이 극장에 뱀을 풀어 가면서 이에 저항했던 연유다.

‘정의 상품’에 올인하는 충무로 #흥행은 얻어도 실험은 사라져

물론 그로부터 적잖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한국 관객은 극장에서 압도적으로 한국영화를 선호하는 시대가 됐다. 일년에 1000만을 모으는 한국영화가 1~2편씩 쏟아진다. 시장 규모만 커진 게 아니다. 해외영화제에서의 성과 등으로 대표되는 질적 성장 또한 눈부시다. 다음달 열릴 칸 국제영화제에는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 등을 만든 세계적인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가 투자 제작하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홍상수 감독, 김민희 커플의 ‘그 후’와 함께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홍 감독은 ‘클레어의 카메라’로 비경쟁부문에도 진출했다. 또 박찬욱 감독은 경쟁부문 심사위원이다. 모두 한국영화 브랜드 파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한국영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문화부 기자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박찬욱·봉준호·김기덕·홍상수 등 한국영화의 판 자체를 흔드는 재능 있는 감독들이 쏟아지고 관객수 1000만, 1500만의 불가능해 보이던 고지를 넘을 땐 함께 환호성을 올리기도 했다. 관객의 입장으로도 ‘한국영화가 세계 최고 자본력 할리우드 영화에 밀리지 않는다’ 혹은 ‘타성에 젖은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보다 낫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한국영화를 선택하곤 했다.

그런데 웬걸, 언젠가부터 한국영화 보는 게 심드렁해지고 있다. 최근 1~2년 사이의 일인 것 같다. 챙겨본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급격하게 줄고 있다. 다음달 초 황금연휴를 맞아 충무로가 차린 밥상에도 딱히 입맛이 동하는 메뉴가 없다. 어느 정도의 질과 재미를 보장해 굳이 돈이 아까울 것까지는 없지만 제목과 배우군단, 영화 카피 문구만 딱 봐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 100% 영화들에 대한 피로감이 온다. 재벌·정치권력 등 기득권은 악행을 일삼고 이에 맞선 정의의 분투와 승리를 드라마틱하게 그린 영화들이다. 2015년 1000만 영화 ‘베테랑’으로 시작해 26일 개봉한 ‘특별시민’에 이르기까지 일명 ‘사회적 분노 장르’ ‘정의상업주의 영화’들이다. TV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없다. ‘법비(법률가도적)’를 다룬 ‘귓속말’, 의적 이야기 ‘역적’ 등이 이 계보다.

물론 이처럼 ‘정의상품’이 흥행의 키워드로 자리 잡은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 정의가 부재하며 정의에 대한 대중의 갈망이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같은 사회파 영화들이 복잡한 현실 문제를 선악 이분법이라는 단순한 서사의 그물망에 넣어 붕어빵처럼 찍어대면서 문화적 상상력을 잃고 있다는 데 있다. 문화소비를 통한 현실갈등의 상상적 해소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동안 한국 TV는 연애만 해서 문제라고들 했는데, 요즘엔 한국영화가 소시오패스 기득권의 악행 고발에만 올인해서 문제가 아닌가 한다. 문화가 가장 경계해야 할 획일화, 상투성의 문제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영화계에 진정한 문제작이나 문제적 신인의 출현이 뜸해진 지도 꽤 됐다. 하필 지난달 극장가에서는 외화가 한국영화를 밀어 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집계 결과 3월 극장의 관객 점유율은 한국영화 31.5%, 외국영화 68.5%였다. “요즘 한국영화는 너무 뻔해서 궁금하지 않다”는 주변의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 온다.

한류 전문가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홍석경 교수는 “한류의 위기라는 게 따로 없다. 한국의 드라마 팬들이 한국 드라마를, 한국 팬들이 한국영화와 K팝을 더 이상 찾지 않는 것 그게 진짜 한류의 위기”라고 말했다. 300% 공감한다. 한류의 위기가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양성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