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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증세 없는 복지:시즌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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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박근혜 정부가 출범 후 1년간 가장 공을 들인 경제 정책은 ‘경제 민주화 폐기’였다. 선거 막판 덜컥 받긴 했는데 막상 집권하고 보니 답이 안 나왔다. 퍼주기 공약까지 남발한 터라 나라 곳간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소리 소문 없이 경제 민주화 공약을 무력화하는 게 경제 정책의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박근혜 정책의 대표적 형용 모순으로 불리는 ‘증세 없는 복지’를 밀어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불문가지. 경제 민주화는 사망, 증세 없는 복지는 ‘증세도 복지도 없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게다가 답 없는 증세 없는 복지에만 매달리느라 경제 정책의 큰 그림을 내놓지 못했다. 집권 1년 뒤에야 애매한 이름의 창조경제가 탄생한 배경이다.

누가 돼도 퍼주기 공약 #벌써 경제가 걱정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던가. 박근혜의 실패에서 대선후보들은 도무지 배울 생각이 없는 듯하다. 유력 후보 문재인·안철수의 공약엔 ‘주겠다’만 있고 ‘어떻게’가 빠져있다. 문재인은 190여 개의 공약에 연간 35조6000억원, 안철수는 153개 공약에 연 40조원이 필요할 것으로 봤다. 노인·아동·청년, 세대별로 골고루 연금·수당을 약속했다. 정확한 비용도 아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관계자는 “(공약 실천 비용이) 더 들면 더 들었지 덜 들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돈 마련 계획은 더 부실하다. 두 후보는 “재정·조세 개혁을 통해 조달하겠다”는 선거철 모범답안만 되뇐다. 기껏 내놓는 게 부자 증세와 소득세 누진 강화 정도다. 가뜩이나 조세 불균형이 심각한 게 우리의 실정이다. 근로소득 상위 19%가 세금 90%를 내고 하위 47%는 한 푼도 안 낸다. 그런데도 이런 조세 불균형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다. 넓은 세원 낮은 과세야말로 분배 개선, 공정 사회의 지름길이다. 이런 기초 경제학을 모를 리 없는데도 ‘부자 증세’만 외친다. 지도자들이 표만 보다 보니 나온 결과다.

이번 선거는 공약 이슈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정책 준비 기간이 짧았던 데다 야야(野野) 대결이라 차별화도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같은 과제를 놓고 누가 더 퍼주느냐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 언론 매체는 “100억원 받고 1000억원 더”라며 이를 포커판에 비유하기도 했다. 임대주택 공약이 대표적이다. 문재인은 85만 가구, 안철수는 75만 가구를 짓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을 땅이나 돈은 어떻게 할지 계획이 없다. 상대가 내놓으니 나도 내놓는다는 식이다. 재원 없이 임대주택 한 채를 늘릴 때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빚이 평균 1억1000만원씩 늘어난다. 자칫 2010년 LH의 경영위기(총 부채 142조원, 하루 이자 100억원)가 재연될 수 있다.

미세먼지 대책이라며 내놓은 원전·석탄발전소 건설 중단 공약은 또 어떤가. 이미 착공한 신고리 5·6호기와 설계 용역을 마친 신한울 3·4호기 공사를 중단하면 매몰비용만 1조9000억원가량 든다. 석탄발전소 9곳(문재인)·6곳(안철수)을 없애려면 못해도 2조, 최대 3조원이 필요하다. 이를 친환경 LNG로 대체하려면 추가로 연간 1조3640억원(620억㎾HX22원)의 돈이 든다. 전기요금을 대폭 올리거나 한국전력을 빚더미 위에 올려놓는 수밖에 없다. 20년 단위로 짜는 국가 에너지기본계획을 달랑 대선 공약으로 바꿔치려다 보니 나온 무리수다.

이대로라면 누가 되든 ‘증세 없는 복지: 시즌2’가 불가피하다. 누가 되든 언론은 또 ‘공약을 지키지 말라’고 주문해야 할 판이다. 이해는 간다. 차별화할 머리는 없고 집권 욕심은 넘치니 어쩌겠나. 하지만 퍼주기보다 나라를 빨리 망치는 지름길은 없다. 벌써 나라 경제 망가지는 꼴이 보이는 듯해 불길하다. 조지프 슘페터가 1942년『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한 그대로다. “자본주의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지적 환경이 자본주의의 성공과 지식인들의 비평에 의해 약화될 것이며 그로 인해 자본주의는 망할 것이다. 선거로 뽑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기업가 정신을 제약하는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