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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승자의 저주’ … SK하이닉스 ‘트리플 크라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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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2011년 11월 어느 날,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SK텔레콤 등 주요 계열사 경영진들과 서울 서린동 본사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현안 논의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오른 주제는 하이닉스 인수. 경영진들은 3조~4조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뛰어든 인수전이 ‘승자의 저주’가 될 수 있다며 난색을 보였다. 반도체는 ‘치킨게임’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분야였다. 9조 원짜리 부실기업에 큰돈을 쏟아부었다가 자칫 그룹 전체가 휘청일 수 있다는 게 참모들의 우려였다. 최 회장은 밀어붙였다. 그는 “에너지·화학 중심의 비즈니스만으로는 성장이 멈추고 고사하는 ‘슬로우 데스’에 직면할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2004년 SK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자주 강조한 얘기였다. “인수합시다”. 최태원 회장은 최종 결정을 내렸다.

부실기업 우려 속 6년 전 인수 결단 #전통적 비수기 1분기에도 영업 호조 #영업익 61% 늘어 2조 5000억 육박 #과점체제 굳어져 당분간 순항 예상

이렇게 탄생한 SK하이닉스가 지난 1분기 2조5000억원 영업이익이라는 과실을 안겼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분기 매출 6조2895억원, 영업이익 2조4676억원을 달성했다고 25일 공시했다. 전 분기 대비 매출은 17.4%, 영업이익은 60.6% 늘어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매출·영업이익이 각각 72%, 339%나 급증했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무려 39.2%에 달한다. 100원어치를 팔아 39원의 이익을 남긴 셈이다. 40%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던 2004년 2분기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많이 남는 장사’를 했다. 이로써 SK하이닉스는 지난 분기에 매출·영업이익·당기순이익 모두 신기록을 세우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자료: SK하이닉스

자료: SK하이닉스

1분기 실적이 시선을 끄는 건 이 시기가 반도체 업체에는 전통적인 비수기여서다. 연말에 블랙 프라이데이, 크리스마스 연휴 등 디지털 기기의 소비가 몰려 있다 보니 1분기에는 상대적으로 수요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계절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약한 기간 임에도 불구하고 작년 하반기 이후 반도체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는 등 시장 환경이 좋아져 분기 최대 실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시장조사기관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의 범용 제품인 DDR4(4Gb 512Mx8/2133㎒)의 고정 거래가는 지난해 6월 1.31 달러로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 올해 2월 말 2.75달러까지 치솟았다. 이후 3월 말까지 같은 가격을 유지했다.

낸드 플래시(64Gb 8Gx8 MLC)도 작년 6월 말 2.24달러에서 올해 3월 말 기준 3.56달러로 59%가량 뛰었다. D램의 경우 스마트폰 스펙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중국의 수요가 급증했다.

이순학 한화리서치 연구원은 “중국 업체들이 램 용량을 삼성이나 애플보다도 높은 6GB 이상을 채용하면서 고성능 D램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낸드 플래시 시장은 스마트폰 고용량화와 자율주행차, 클라우드 등의 성장에 힘입어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PC와 스마트폰이라는 전통의 수요에다 사물인터넷(IoT)과 자율주행차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칩 가격이 고공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호실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메모리 분야는 90년대 치킨게임 이후 3사 과점체제가 굳어졌다. 승자 독식 구조가 뿌리를 내렸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D램 시장 점유율 26.7%로 삼성전자(47.5%)에 이어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3위 마이크론은 19.4%를 차지하고 있다.

증권 업계는 서버용 D램 수요의 강세가 계속되고 있고, 모바일용 D램 수요도 견고해 D램 부문의 실적 개선이 2분기에도 확대될 것으로 본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메모리 수요가 줄지 않고 연말까지 이어진다면 SK하이닉스는 연간 영업이익 10조 원을 무난히 달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승자의 독식’ 우려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만들어낸 최 회장이 도시바 인수전에서 신화를 재연할 지 주목하고 있다. 지난 24일 일본으로 건너간 최 회장은 조만간 도시바를 방문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SK그룹 관계자는 “출국에 앞서 최 회장이 ‘지금까지 진행된 입찰 금액은 의미가 없고 본 입찰이 시작되면 많은 게 달라질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며 “위기 때마다 굵직한 M&A로 그룹을 도약시킨 승부수를 띄웠던 최 회장이 이번엔 또 어떤 승부수를 던질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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