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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애니 한계 부딪혀…한국이 나설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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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를 산으로 데려가면서 아주머니는 들고갈 짐을 줄이려고 옷을 겹겹이 껴 입힙니다. 팔을 움직이는 것도,걷는 것도 불편하죠. 산을 오르다 양떼가 뛰어노는 것을 보고 하이디는 이걸 다 벗어버립니다. 30도가 넘는 가파른 경사에서 실제로는 양도 소녀도 그렇게 자유로이 뛸 수가 없어요.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표현입니다. 육체적으로 구속돼있던 하이디가 정신적으로도 해방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다카하다 이사오(68)감독이 지난주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의 초대손님으로 내한,한국의 젊은 애니메이션 창작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었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은 "신작을 준비중이나 아직 구체적 내용을 밝힐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른쪽은 그가 감독한 TV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 [임현동 기자]

국내 시청자들의 기억에도 생생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엄마찾아 삼만리''빨강머리 앤'등 그가 만든 작품들은 새로운 소재와 표현기법으로 일본 TV애니메이션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후 그는 평생의 동료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등의 제작자로, '헤이세이 너구리 대작전''반딧불의 묘''추억은 방울방울''이웃의 야마다군'(모두 국내 미개봉)등의 감독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끌어왔다. 그럼에도 미야자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대표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 비판의 시각을 감추지 않았다.

"'센과 치히로…'나 '인랑'은 언뜻 보기에 다른 것 같지만 관객이 주인공에 동조하도록 하는 점에서는 같죠. 일본 애니메이션 대부분이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미국 디즈니가 만든 '피노키오'는 피노키오가 고래에 쫓기는 장면에서 고래와 피노키오를 대등하게 다루지만, 일본에서라면 피노키오의 편에서 고래가 입을 벌이고 점점 다가서는 방식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감정이입을 극대화하는 이런 방식이 "관객이 주인공 이외의 다른 시점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없앤다"고 지적했다.

실사처럼 보이게 하는 것에 치중하는 최근 3D애니메이션의 경향에도 우려를 표했다. "만든 사람이 표현하려는 것 대신 진짜같으냐, 아니냐에만 관객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3D애니메이션이지만 미국 픽사의 작품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센과 치히로…'같은 일본작품은 감정이입을 하기 쉽게 인간이 주인공입니다. 반면 '토이스토리'는 장난감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이웃의 토토로'에서는 두 명의 인간 소녀가 토토로를 발견하지만 '몬스터 주식회사'에서는 몬스터가 인간 소녀를 발견합니다. '니모를 찾아서'까지 픽사의 작품은 모두 인간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픽사의 존 레스터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엄청난 팬입니다. 그렇지만 미야자키와 디즈니 양쪽을 축으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낸 겁니다. 한국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배울 것은 배우되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해 잘 모른다"고 전제하면서도 이번에 본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같은 작품을 거론하며 격려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금 한계에 부딪힌 상황입니다. 한국에는 좋은 소식이죠.일본에서는 이제 한국이 부상할 때라는 말들을 합니다."

그는 경기부진에 풀죽은 한국 후배들에게 "요즘 들어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일본의 주력 수출품으로 애니메이션을 꼽지만, 애니메이션업계는 예전부터 쥐꼬리만한 월급에 시달리는 일본의 '빈곤지대'였고 지금까지 정부가 도와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면서 "애니메이션이 지탱되는 것은 유망한 산업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사람들의 열정 때문"이라고 들려줬다.

그는 강연회 뒤 가진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차이를 묻자 "첫째로, 그는 천재고 나는 천재가 아니다"라고 답해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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