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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살리에리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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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런데 살리에리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좀 달랐다. 영화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훔쳐 와서는 읽어보다가 악보를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악보를 볼 때, 살리에리의 머릿속에서 울렸음에 틀림없는 모차르트의 곡이 관객에게도 들린다. 나는 감탄했다. 그 복잡한 악보를 보면서 곧장 전곡이 머리에서 들렸다니, 살리에리 역시 천재가 아닌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교회 성가대의 일원이었다. 작은 교회여서 고등부 학생이라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았으니, 대개의 학생이 다 성가대원이었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어떤 날은 테너 파트에 대원이 나 혼자여서, 지휘자가 지휘를 하면서 테너 파트를 노래했던 적도 있다. 군대에 다녀오고 다시 청년부 성가대에서 들었는데, 연습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고등부 성가대에서는 파트별로 피아노 반주자가 선율을 들려주었다. 그걸 잘 외워서 성가대 석에 섰는데, 청년 성가대에서는 그냥 전곡을 진행하고 각 파트에 속한 사람들이 악보에 따라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그때 오선지를 보면서 깨달았다. 아, 나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구나. 내가 참여하면 성가대가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파트로 구성되겠구나. 그런 나였으니 모차르트의 곡을 악보만 읽으며 들었던 살리에리가 대단했을 수밖에.

천재에게는 다른 이의 시선이 굳이 필요치 않다. 그는 가뿐하게, 독자적이며 독재적이다. 자기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보는 자기 자신이 일치하는 사람이 천재다. 반면 범재가 범재로 낙인찍히는 것은 다른 이의 시선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의존적이며 종속적이다. 자기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보는 자기 자신 사이에 늘 빈틈이 있다. 그러니까 범재에게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과 타인이 자신을 본다고 그 자신이 생각하는 시선. 편집증은 자기 자신의 시선을 내세워 타인의 시선을 왜곡할 때 생겨나고, 강박증은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여 자기 자신의 시선을 왜곡할 때 생겨난다. 모차르트는 잘난 자신을 보는 시선과 자신을 잘났다고 보는 타인의 시선(살리에리의 시선)을 일치시킨 천재였다. 살리에리는 잘난 자신을 보는 시선과 자신을 못났다고 보는 타인의 시선(모차르트의 시선)이 분열된 범재였다. 그게 나누어지지 않았다면, 그에게 무서운 질투와 그보다 더 무서운 열등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밖으로 나와서, 나는 살리에리를 천재라고 부른다. 잘난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과 그가 잘났다고 보는 타인의 시선(내 시선)이 일치하니 말이다.

자기 자존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열등감은 언제나 타인의 불편하고 무서운 시선 때문에 생겨난다. 자식을 쳐다보는 부모의 시선으로, 제 새끼더러 함함하다(보드랍고 윤기가 있다는 뜻이다)고 하는 고슴도치의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서나 천재를 발견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살리에리에게 질투를 느낀다.

권혁웅 한양여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