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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기숙사가 혐오시설? … 서울 곳곳 주민 반발에 첫 삽도 못 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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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9일 오후 서울 동소문동 H아파트 단지 부근 공터. 가로·세로 각각 100m가 넘는 공터 둘레엔 3m 높이의 철제 펜스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행복기숙사 건축 부지로 무단 점유 경작물과 시설물은 철거합니다”라는 안내글이 붙어 있다. 한국사학진흥재단과 한국장학재단은 국유지인 이 땅에 2015년까지 대학생 연합 기숙사(행복기숙사)를 건립하려고 했다. 서울 지역 대학 20~30곳에 다니는 지방 출신 학생 751명의 주거 걱정을 덜어 주려는 시설이다. 행복기숙사는 지난 2월 성북구청으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착공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공공기관·대학들이 직접 나서 #주거비 걱정 덜 기숙사 추진했지만 #“유흥문화 확산, 소음 우려” 반대 #구청의 주민 눈치보기 행정도 한몫

‘행복기숙사 추진 반대 위원회’ 관계자는 “기숙사 부지는 단체장이 선거 때마다 입주민을 위한 공원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땅”이라며 “우리에겐 공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이 말하는 반대 이유 중엔 ▶공사 중 소음·분진이나 안전사고 ▶대학생 유입에 따른 유흥문화 확산 우려 등도 있다. 박갑식 사학진흥재단 기금사업본부장은 “2014년 문을 연 홍제동 행복기숙사는 체력단련실과 주차장을 개방해 주민들이 반기고 있고 지금까지 주민 민원이나 불미스러운 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학생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정부와 공공기관, 대학 등이 추진하는 기숙사 신축 계획이 곳곳에서 암초에 부닥치고 있다. 주민 반대에다 건축 허가권을 쥔 구청의 ‘눈치 행정’까지 겹쳐 추진이 쉽지 않다.

한국장학재단이 서울 성동구 응봉동 국유지에 대학생 1000명 수용 규모(6157㎡)의 연합 기숙사를 짓는 계획은 지난해 10월 발표 이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건축 허가가 나려면 관할 성동구청이 먼저 서울시에 심사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서울시에 심사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권기철 성동구청 도시관리팀장은 “주민 반대가 심해 구청으로서는 기숙사 건립을 찬성하기 힘들다”며 “장학재단이 주민을 직접 설득해 민원을 해결한 뒤에 요청하거나 서울시와 직접 협의해야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학재단 관계자는 “국유지 외엔 대체부지도 없는데 주민들은 ‘무조건 반대’만 외치고, 구청은 ‘나 몰라라’ 한다”고 말했다.

대학이 학교 부지 안에 기숙사를 짓는 경우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고려대는 2013년 학교 부지인 개운산 근린공원 내에 1100명 수용 규모(2만5782㎡)의 기숙사 신축 계획을 발표했으나 4년째 진척이 없다. 관할 성북구청이 공원 조성 계획을 승인해 줘야 하는데, 산림 훼손 등을 우려한 주민 반대를 이유로 반려했다. 김병완 성북구청 공원기획팀장은 “고려대에 산림 훼손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해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했는데 아직까지 회신이 없다”고 말했다. 고려대 관계자는 “이미 배드민턴·테니스장과 체력단련실 등 주민 편의시설 등을 제공하는 대안을 내놓았는데도 구청은 자꾸 보완책만 더 요구한다”고 하소연했다.

한양대의 ‘6기숙사’(외국인 학생용·540명)와 ‘7기숙사’(국내 학생용·1450명) 신축 계획 역시 2015년 발표 이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방준효 서울시 시설계획과 팀장은 “반대 의사를 밝히는 민원인 상당수가 임대업자들”이라며 “구청·대학과 함께 협의 테이블을 만들려고 해도 이들이 워낙 강경해 난감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우윤석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는 “임대업자들의 생존권 보장 요구와 대학생의 주거 부담 경감 문제는 사실 타협하거나 협상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며 “누가 더 사회적 약자인가에 초점을 둬 관할 지자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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