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소설보다 더 기이한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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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최근 우리는 소설보다 더 기이하고, 충격적인 현실을 겪고 있다. 한 재벌의 총수가 자살하자 재벌행태를 줄곧 비판하는 쪽에 섰던 일군의 단체와 인사들이 그를 의인화(義人化)하는 듯한 거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총련 학생들은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를 기습 점거했다. 포탑이 회전하고 실제 사격이 이뤄진 현장에서 그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 어느 쪽이든 희생자가 났더라면 하는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권노갑씨의 구속영장 신청에서 밝혀진 현대 비자금 2백억원의 전달방법은 한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도덕성과 개혁을 상표처럼 달고 다녔던 김대중 정부의 부패상은 그의 일가와 처족들 중 기소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에서 보듯 이미 결판났다.

그래도 2백억원의 거액을 모두 현찰로 받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할 줄이야, 더구나 존망지추에 직면한 기업을 비틀어 그런 거액을 챙길 줄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이런 사건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뇌에는 지진이 일어날 정도인데 현직 대통령이 그 주변의 의혹들을 보도한 기사를 놓고 중앙일보를 비롯한 4개 신문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민망한 사태까지 발생했다. 盧대통령과 그 주변이 그런 보도에 따라 실제로 명예를 실추당한 면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의 울화는 충분히 짐작된다.

그래도 盧대통령이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 정당하고 바람직한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국가의 최고위직 공인이 그 주변과 관련된 의혹보도에 대해 재임 중 소송을 제기한 행위가 미칠 파장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권력핵심에 대한 보도를 위축시키면서 언론자유를 제약할 것이다. 그 결과는 최악의 경우 대통령과 그 주변의 부패를 막는 길이 차단될 것이다. 언론이 권력주변의 의혹혐의를 잡았다 해도 그것의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라와 국민의 몫이 된다.

그렇기에 현직 국가원수가 그런 이유로 언론에 소송을 제기한 국제적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사안은 더군다나 대통령 측과 한 국회의원 간의 송사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지, 언론의 주도적 취재결과가 아니었다.

그 의원이 자구책으로 대통령 주변의 의혹을 잇따라 제기하자 거의 모든 언론이 이를 취재.보도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와 당사자들의 미숙한 대응은 의혹을 사실 이상으로 키운 측면이 있었다. 검찰도 그 의원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던 것을 왜 언론이 책임져야 하는가.

盧대통령과 민주당은 지난 대선 당시 야당 후보와 그 주변에 대한 각종 의혹을 제기했다. 언론은 그 의혹을 보도했다. 그 의혹들 중 대부분이 무혐의로 결론났다. 盧대통령 측의 그런 거짓 주장까지 보도했던 언론에 대해 盧대통령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의 언론소송 제기가 자가당착적 권리주장이라는 방증이다.

대통령의 자리는 변호사나 후보의 신분과는 천양지차의 책무와 사명.헌신을 요구한다. 5년의 재임기간은 나라를 부흥시킬 수도,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는 연한이다. 대통령이 사사로운 권리에 집착할 때가 아니다. 원대한 포부와 비전을 갖고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이 기껏 소송공화국을 부추겼다는 누명을 써서야 되겠는가.

언론과 기자도 성찰해야 한다. 잘못이 있다면 피해구제에 인색해선 안 된다. 공익을 위해서라면 쟁송이 겁나거나 귀찮아 물러서서도 안 된다. 지난 세월의 허물 때문에 오늘의 권력에 타협하거나 아첨해선 안 된다. 權씨의 현대 비자금 수수혐의처럼 또 무슨 소설보다 더 진귀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언론은 깨어 있어야 한다.

이수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