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보지 않은 길…대우조선, P플랜 가면 살 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법정관리의 일종인 ‘프리패키지드플랜(P플랜)’ 말이다. 정부와 채권단은 17, 18일 열릴 사채권자 집회에서 채무조정안이 부결되면 21일 전후로 대우조선해양을 P플랜에 집어넣겠다고 공언했다. 대우조선이 P플랜 1호 기업이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현재로선 짐작하기가 어렵다. 정부와 채권단, 대우조선뿐 아니라 회사채 투자자들도 P플랜 돌입에 대해 불안해하는 이유다.

P플랜, 최단 4주 만에 회생절차 끝낼 수 #관건은 선주들 얼마나 계약취소 하느냐 #산은 "디폴트는 8척" 증권사 "너무 낙관적" #국민연금은 회수가능금액 10%로 떨어져

P플랜은 지난해 8월 법 개정으로 도입된 초단기 법정관리 제도다. 기존 법정관리 절차를 크게 줄여서 보통 6개월~1년 반 걸리던 기업회생에 걸리는 시간을 3개월 이내로 단축한 게 특징이다.   

시간을 크게 줄인 건 채권단이 미리 만든 회생계획안을 가지고 P플랜을 신청하기 때문이다. 일반 법정관리는 신청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어떤 채권이 있는지를 확정한다. 채권단 명단과 채권액 규모를 확정하는 데만 통상 2개월이 걸린다. 이후 채무자가 회생계획안을 제출하는데 또 6주 이상이 걸린다. 이와 달리 P플랜은 채권단의 2분의 1 이상이 이미 동의한 사전회생계획안이 P플랜 신청과 동시에 제출된다. 따라서 채권 확정, 회생안 제출 등에 드는 4~5개월을 생략한다.


회생계획안 의결 절차도 간단하다. 법정관리는 회생안 보고·심리·결의를 위해 3회의 관계인 집회를 연다. P플랜은 관계인 집회를 생략하고 서면결의로 대체한다. 무엇보다 사전회생계획안을 짤 때 이미 부채의 절반 이상을 가진 채권자의 동의를 받아놨기 때문에 쉽게 가결될 가능성이 크다.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빌딩 앞 모습. [중앙포토]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빌딩 앞 모습. [중앙포토]

신규 자금지원도 수월하다. 보통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금융회사는 신규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하지만 P플랜은 채권단이 사전 회생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신규자금지원 계획도 함께 짜기 때문에 운영자금 지원에 문제가 없다. 

회생법원에 따르면 이론적으로는 P플랜 신청 시점부터 회생계획 발효까지 4~5주 안에도 끝낼 수 있다. 권창환 서울회생법원 공보관(판사)은 “법원은 계획안의 공정성·형평성·수행가능성을 기준으로 인가를 결정한다”며 “채권·채무자가 자신의 입장만 욕심 부리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만한 계획안을 협상을 통해 마련한다면 실제로도 4~5주만에 종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대우조선이 P플랜 1호 기업이 된다면 회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관건은 두가지다. 하나는 회생계획안이 신속히 인가될 정도로 채권자의 동의 과정이 순탄하겠느냐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대규모 계약 취소가 쏟아지는 부작용이 없느냐다. 

P플랜은 일반 법정관리와 마찬가지로 무담보채권에 대해 대규모 출자전환을 요구한다. 채권단은 그 비율을 90%로 보고 있다. 나머지 10% 채권도 길게는 10년가량 분할상환하는 것으로 예상한다. '50% 출자전환+나머지 3년 만기유예, 3년 분할상환'이라는 채무조정안에 반대해온 회사채 투자자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다. 때문에 무담보채권(상거래 채권 포함) 보유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P플랜이 가결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회생채권자의 설득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익명을 원한 채권단 관계자는 “협력업체 등 상거래 채권자(2조원 규모)는 신규자금 지원이 이뤄진다면 회생계획안에 동의할 것”이라며 “1조5500억원 규모의 사채권자가 반대해도 3분의 2 동의는 무난히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주들의 계약취소 규모가 얼마나 될지에 대한 추정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대우조선이 짓고 있는 배 중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선주가 계약을 취소할 수 있는 조건(빌더스 디폴트)이 있는 건 96척. 산업은행은 10일 언론브리핑에서 P플랜 도입 시 선주사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씨드릴(노르웨이 원유 시추업체)과 소난골(앙골라 국영석유회사) 발주 건을 포함한 8척의 계약이 취소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경우 선주들이 선수금환급보증(RG)을 이용해 금융회사로부터 돌려받을 선수금 규모는 7000억원으로 계산된다.

보통 선주들이 배를 발주할 때는 배 건조비의 10~30% 정도를 선수금으로 먼저 조선사에 준다. 조선사가 배를 인도하지 않을 위험에 대비해 선주들은 RG를 금융회사로부터 보장 받는다. 조선사가 부도처리 되거나 다른 사정으로 배를 건조하지 못하면 선주들은 금융회사로부터 선수금을 돌려 받는다. 채권단 관계자는 "RG를 요청할 것으로 예상되는 8척은 산은이 대면·서면으로 모든 선주사와 접촉해 구조조정안과 P플랜 가능성을 설명한 뒤 파악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런 추정치가 낙관적이란 지적도 있다. 가뜩이나 해운 경기가 바닥인 상황에서 선주들이 얼마든지 P플랜을 빌미로 계약 취소에 대거 나설 수 있다는 우려다. 일단 RG콜(선수금 환급 요청)로 선수금을 돌려 받은 뒤, 고철로 전락할 위험에 있는 선박을 중고시장에서 헐값에 사들인다면 선주로선 두 배로 이익이다.

임민정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대우조선 관련한 RG 규모만 13조5000억원인데 그 중 절반만 RG콜이 들어와도 금융권에 6조~7조원의 손실이 닥친다”며 “규모가 워낙 커서 그 여파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만약 대규모 RG콜이 현실화된다면 당장 8조원 넘는 대우조선 RG를 보유한 수출입은행이 휘청거리게 된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한자리수로 떨어지면서 자본확충이 불가피하게 된다. 익명을 원한 다른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한진해운 법정관리 때도 정부는 준비가 다 돼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큰 혼란이 벌어지지 않았느냐"며 "P플랜 돌입 준비를 마쳤다는 정부 설명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따라서 P플랜행이 현실화하면 대우조선의 운명은 '모 아니면 도'다. 회생절차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빚을 대거 털고 가볍게 새출발을 할 수 있지만, 계약 취소가 쏟아지면 자칫 회생 불능의 처지에 빠질 수 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채권자들은 P플랜으로 가면 손에 쥘 게 더 줄어들 수 있다. 현재의 채무조정안에서는 최소한 상환유예한 50%의 채권액이라도 건질 수 있지만 P플랜으로 가면 10%에 그친다. 정부와 채권단 관계자가 국민연금을 향해 "경제적 합리성을 보고 판단해달라"고 줄곧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국민연금은 12일 또는 13일에 대우조선 채무재조정안 수용 여부를 논의할 투자위원회를 열 예정이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