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유관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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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호승(1950~ ) '유관순' 전문

그리운 미친년 간다
햇빛 속을 낫질하며 간다
쫓는 놈의 그림자는 밟고 밟으며
들풀 따다 총칼 대신 나눠주며 간다
그리움에 눈감고 쓰러진 뒤에
낫 들고 봄밤만 기다리다가
날 저문 백성들 강가에 나가
칼로 불을 베면서 함께 울며 간다
새끼줄에 꽁꽁 묶인 기다림의 피
쫓기는 속치마에 뿌려놓고 그리워
간다. 그리운 미친년 기어이 간다
이 땅의 발자국마다 입맞추며 간다



유관순이 죽은 나이는 16세, 사인(死因)은 고문으로 인한 자궁파열이었다. 그녀의 이름 위에는 언제나 '열사'라거나 '누나'라는 관념적 접두사가 따라다닌다. 오늘, 지하철이나 학교 앞에서 재잘거리는 16세 소녀들을 본다. 아름다운 그녀를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 신념과 용기로 역사 위에 선 풋풋한 처녀. 충청도 그녀의 고향, '아우내'에는 동상이 서 있다. 보기 드문 이 땅의 자유주의자, 오늘도 태극기 흔들고 서있다.

문정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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