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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파동|"JP공격「막후」겨냥한 계산된 행동설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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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0년봄 김종필공화당 총재는 오늘처럼 공화당 18년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했다. 그때는 공화당의 통치, 특히 유신체제에 대해 변호보다는 잘못의 시인쪽이었다.
이제 신민주공화당의 총재로 80년 봄에 못다한 일을 하겠다고 나선 김총재는 지난 3일 관훈클럽토론회에서 유신체제도 포함된 공화당 18년에 대해 7년전보다는 훨씬 당당하려 애썼다.
김총재 자신은 3선개헌이나 유신체제를 반대했다면서도 한정된 기간에 할 일을 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이 당시 책임있던 사람으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에서 그런 변화를 읽을수 있다. 이것을 세월의 변화라고 할까.
80년 봄 그의 도전이 공화당 18년의 심판을 받으려던 것이었다면 이것을 막고 나선 바람의 하나는 이후락 파동이다. 그때 이후락씨는 김총재가 박대통령의 이념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아 견해차이를 빚었다고 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오. 5·16혁명을 같이 했고 공화당을 창당했고 유신정부 밑에서 총리까지 지낸 그 사람이 설사 박대통령의 잘못이 있더라도 내 책임이라고 하면서 각하를 잘못 받들었다는 말로 국민의 심판을 받는것이 정치인의 태도가 아니겠소. 그의 사고방식은 의심하지 않을수 없어요』라고 이후락씨는 말했었다.

<미국서 서둘러 귀국>
작년 봄 김종필·이후락 두사람은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년7개월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김종필씨는 귀국 2주가 지난 86년3월11일 중앙정보부 출신들의 친목단체인 양지회 오찬모임에서 이후락씨와 만났다. 김종필씨의 귀국환영의 모임이던 이 자리에서 이후락씨는 『오늘 우리가 만난 것은 박대통령을 모신 인연으로서인데 지금은 박대통령께서 안 계시니 그 유업을 이을 사람은 김총재 밖에 없다』면서 『김총재는 박대통령의 위업계승을 위한 일을 맡아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 올바른 시국관을 갖고 자중자애하면서 처신해달라』고 말했다.
김종필씨는 80년 봄보다는 지금 박대통령의 가까이로 다가선 자세다. 그런 면에서 이후락씨와의 화해는 일단 설명이 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년 봄의 두사람 사이의 화해는 이후락씨가 김총재의 변화를 확인하고 이루어진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80년봄 김총재에 대한 이후락씨의 거친 공격이 김총재가 박대통령의 유업을 계승하는 의지가 부족하다는것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다.
그 해 봄 공화당이 마주친 이후락파동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0·26후 이후락씨는 두가지 곤란한 문제를 걱정하는 입장으로 보였다. 그 하나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연결되었다는 세상의 눈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축재했다는 의혹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서둘러 해외로 나가자 모두들 정치피난이라고 봤다. 그랬는데 3개월만에 귀국했다. 그때는 온갖 문제들이 한꺼번에 폭발해 있었다.
정부와 국회 사이에 개헌방향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신당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신당은 공화당을 젖히고 나설 새로운 범여권 정당으로 최규하정부가 주도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공화당은 정풍운동이 일고 있었고 정풍파의 과녁엔 이후락씨가 포함되어 있었다. 때맞춰 야당도 폭력사태까지 일어나는 내부문란으로 요동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혼란속으로 그는 찾아들었다. 그리곤 바로 그 혼란의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이후락의원의 김종필총재 퇴진요구는 공화당을 벌집 쑤신듯 만들었다. 이후락의원의 김총재 공격을 공화당은 이후락의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곤 반란이 있었던 다음날 6개의 회의를 열었다.
상오8시 중앙위 운영위원회·9시 청년당원의 이후락규탄궐기대회·9시30분 당무회의·11시 국회상임위원회·가락동의 공화당중앙훈련원에서는 궐기대회가 열렸고 이와 별도 정풍파들이 아침7시부터 호텔에서 회의를 했다.
이 모든 회의는 그들이 말하는 이후락 반란대책이었다.
44명의 중앙위운영위원중 44명 모두 참석한 회의에서 어차피 환부는 도려내야 한다는 말로 제명을 당무회의에 건의했다. 2백50여명의 청년당원들이 참석한 규탄대회는 더욱 강해 어떤 청년당원은 『정부당국은 이후락씨가 권력형 부정부패의 태두인 이상 그의 전 재산을 국고에 환수해야한다』면서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화형식을 하자고 했다. 사무국 요원들의 모임도, 훈련원의 모임도 모두가 「추방이후락」으로 결론내렸다.
정풍파의 모임도 이후락성토 일색이었다. 정동성의원은 그가 얼마간 미국을 다녀오면서 이의원의 재산을 목격하고 사진도 찍었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이의원 아들의 집은 베벌리 힐즈에 있는 60만달러 짜리의 호화주택으로 내가 사진까지 찍어 왔으며 그 근처에 1천만달러짜리 빌딩도 소유하고있다. 그것뿐 아니고 국내에도 재산이 많다. 내 선거구인 광주에만도 그린벨트에 이의원의 땅이 있고 별장만도 2채가 되는데 어찌 재산이 얼마 없다고 하느냐』고 했다.

<"권력형 부패의 태두">
공화당의 그때 반응은 의외였다. 공화당은 정풍파의원들이 당내 부패인사의 탈당 또는 후퇴를 요구해 2파 3파를 몰고 올때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한 내부처리를 하려했다. 물론 정풍파는 김종필총재를 겨냥하지 않은것이 이후락의원과는 달랐다고 할수는 있지만…. 그러나 김총재를 겨냥한것은 이의원에 앞서 임호의원이다. 임호의원의 김종필총재 성토문은 이후락의원보다 훨씬 더 직설적인 폭로고 공격이었다. 그런 임의원에 대해 당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임의원은 3월21일엔 자신의 당직사퇴서를 내면서 성명도 함께 냈다. 그는 이 성명에서 『원천적인 특권권력층 부정축재자가 새민주시대의 당지도부에 군림하고 있는 현상을 더 이상 좌시할수 없다』면서 『시대적 사명감에서 제기한 김종필총재에 대한 「요구와 권유」를 끝까지 추구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당직을 사퇴한다』고 했다.
그때 공화당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고 단. 2명의 의원이 당에 머물러 더 큰 상처를 입기보다 떠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내비췄을 뿐이다. 그랬던 공화당이 이후락반란에는 신속히 대응했다.
25일 열린 당무회의는 이후락·임호 두 의원은 당의 위계질서를 문란시키고 당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당기위원회의 징계에 회부됐다. 26일엔 당기위원회에 이어 당무회의를 잇달아 열고 이·임 두의원에다 문제가 일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정풍파의 박찬종·오유방등 두의원도 포함된 4의원을 제명과 효력이 같은 탈당권유로 처리했다.
당시의 공화당당헌은 탈당권유 처분을 받은 대상자가 처분을 통고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탈당을 하지 않으면 자동제명 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때 공화당이 서둘러 이·임 두의원등을 제명한 것은 어떤 막후의 움직임과 직접·간접의 관련이 있다고 보고서다. 그때 묻혀져 떠돌던 얘기는 이랬다.
이의원은 두가지 곤란한 문제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신호를 받았거나 그 문제 해결을 겨냥하고 있는것 같다. 우선 이의원은 동향인 울산출신 전직국회의원 C씨와 접촉하고 있었다. C씨는 민주당 출신이다. 아마도 이후락씨의 C씨접촉은 야당의 그에 대한 공격을 완화하기위한 대야접촉을 C씨에게 의뢰하기 위한것이 아닌가 보였다. 그 문제가 잘 풀렸는지는 알 수없다.
다른 하나 이후락씨의 김종필총재 공격은 막후의 어떤 움직임과 관련이 있는듯이 보인다. 그 막후는 공화당과 신민당으로 짜여진 정치질서에 타격을 줌으로써 변화의 요인을 만들고 그 변화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는 사람들일 수 있다. 현재의 정치흐름은 3김씨의 경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3김씨가 어느 면에선 공통된 입장도 지니고 있다. 이런데 어느 한 김씨에게 타격을 주는것은 3김씨의 경쟁체제에 타격을 주어 변화률 만들어낼 길을 열게된다.
이후락반란이 겨냥한 것은 이점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런 배후가 실재하는지 설혹 실재한다 하더라도 이후락씨에게 그런 과제를 주었는지는 알수없다. 어쩌면 변화를 모색하는 어떤 세력이 있다해도 이후락씨가 그 세력과 연결되지는 않은채 그 세력의 구상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아 자신의 어떤 출구를 열려했는지도 모른다.

<3김 경쟁체제에 타격>
어쨌든 그의 갑작스런 귀국과 귀국후의 행동은 분명히 정치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보였다.
이 소문은 그 근거로 두가지를 손꼽았다. 그 하나는 박종규의원의 공화당탈당 움직임이다. 그 무렵 공화당의 한 간부는 박종규의원은 공화당과 김총재를 위해 필요하다면 당을 떠나겠다는 뜻을 이미 김총재에게 밝힌바 있다고 했다.
정품파 의원들도 제2파를 일으킬때 탈당 권유 대상에 박의원도 포함시킨 3명의 의원을 대상으로 하려했으나 박의원은 그때 해외에 나가 있었고 출국전 김총재에게 자진해 당을 떠날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귀국한 후의 그의 거취를 지켜본뒤 논의키로 하고 탈당권유 결정을 유보했었다.
그런데 이후락의원은 미국에서 박의원과 접촉한뒤 귀국했다는 점을 중요시했다.
이의원은 박의원으로부터 어떤 흐름을 얘기듣고 귀국을 결정했고 귀국과 동시에 행동한것 역시 박의원 접촉과 무관하지 않을것 이라고들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의원이 미국에 머물던때 최규하정부 쪽에서 제기한 권력분산의 개헌구상, 즉 이원화정부제를 찬성했다는 것을 손꼽았다. 그는 분명히 정부의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거나 중심부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 행동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후락의원에 대한 당의 즉각 조처는 정치 재편성을 구상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대립되는 공화당의 태도를 분명히 한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공화당의 전격적인 제명권유에 대해 4의원의 어느 누구도 승복하지 않았다. 이윽고 권유통고로부터 열흘이 지난 4월7일 공화당은 4의원의 제명을 의결하기 위한 의원총회를 열었다.
공화당은 마치 그 전해 신민당 김영우총재를 제명했을 때처럼 해외에 나가있던 의원들을 불러들였다. 심지어 자유중국의 장개석총통 5주기 행사에 참석키 위해 대북에 나간 정일권·길전식의원도 불러들였다. 회의장에서는 정풍파 의원들의 어떤 반란을 염려해 당간부들이 정풍파 한사람씩을 맡아 나란히 자리 잡았다. 회의는 외부인을 차단한 보안속에 의원의 어떤 발언도 차단한채 긴장된 표결을 했다.
그랬는데 제명안은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그 무렵의 정부와 국회의 대립, 정부가 주도하는 신당설등이 공화당에 위기의식을 키웠다. 박대통령 시대같은 통제력이 없음에도 이같은 긴장된 분위기의 회의를 열어 4명이라는 적지않은 숫자의 의원을 조용한 가운데 처리할수 있었던 것은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후락의원은 그의 제명을 훨씬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지난달 26일 탈당권유를 받았을때 이미 제명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읍니다. 배후세력이니, 제2탄이니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당원이 총재를 비난 못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공화당도 당내 민주주의를 해야지 어느 개인의 사당으로 돼서는 안됩니다.
공화당으로서는 과거에 없었던 일 아니 충격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디까지나 애당적 충정에서 행한 언행일 뿐입니다. 심지어 일부에선 신당과 관련짓는 모양인데 신당이 그리 쉬운 일입니까…. 부처님에 맹세코 그런 일은 없읍니다. 김종필씨와는 구원이 있을수 없읍니다. 지금이라도 당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할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떳떳한 자세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그를 지지하겠읍니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그를 반대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개인의 사당 아니다">
공화당은 일단 이후락파동을 마무리 했다. 정풍운동 그룹도 정풍바람을 정지하기로 했다. 공화당의 정풍운동이 신민당의 지방당부 개편대회의 폭력사태와 겹침으로써 국민의 정당에 대한 불신을 초래해 정치일정에 차질을 줄 구실이 될수 있다는데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당 내부적으로는 평온을 회복했다 해도 당은 활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공화당과 정부간의 거리는 눈에 띄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공화당조차 정치일정을 알수 없다고 했다. 공화당은 정치일정을 명확히 하자는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현확총리를 국회헌법특별위원회에 출석토록 요구했으나 국무총리가 국회특위에 출석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출석을 거부해 공화당을 어렵게 만들었다. 공화당간부들은 그 무렵의 공화당을 빙하기라고 표현했다.
정치는 어두움을 짙게 했다. 한 외국신문은 당시 한국 정치의 어두운 그늘을 이렇게 표현했다.
『비록 3김씨가 지도적인 대통령후보이기는 하지만 이중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인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더욱 불길한 상황은 군부지도자들이 군관계 뉴스는 계속 검열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현정부에 대한 그들의 역할을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최규하대통령이나 신현확총리가 군부의 지지를 받는 정당의 타협후보로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점증해 왔다. 선거운동이 과열됨에 따라 호감이 가는 한국의 현세는 덧없는 것으로 판정될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잠자고 있는 학생들은 정부 타락의 어떤 징조가 보이기만 하면 또 불만을 터뜨릴 것이다.
또한 심각한 인플레속에서 실망한 근로자들이 욕구불만을 거리에 끌고 나올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정부지도자들은 이같은 불만을 구실로 그들의 통치를 연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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