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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박근혜 흔적’이니 무조건 지우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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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김방현내셔널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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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표지석을 놓고 지금 세종특별자치시 주변에서 논란이 뜨겁다. 표지석은 2015년 7월과 2016년 1월 각각 세종시 청사와 대통령기록관(세종시 소재)에 세워졌다.

세종시민들은 “헌법을 유린한 박 전 대통령의 표지석을 그대로 두는 것 자체가 시민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은 지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일보 3월 18일자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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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면에 앞서 박 전 대통령의 흔적 지우기 시도는 있었다. 지난해 12월에는 경북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가 방화로 훼손됐다. 박 전 대통령의 울산 대왕암공원 방문(지난해 7월)을 기념해 설치됐던 안내판 속 박 전 대통령 사진을 누군가 훼손하자 울산 동구가 안내판을 아예 철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표지석에 철거를 요구하는 시민계고장이 붙어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표지석에 철거를 요구하는 시민계고장이 붙어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공과(功過) 논란에 휩싸인 정치인의 흔적 지우기 사례는 해외에도 있다. 지난해 1월 중국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에서 마오쩌둥(毛澤東) 동상이 완공을 앞두고 철거됐다. 마오쩌둥이 발동한 ‘대약진운동’의 최대 피해 지역이 허난성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라 해서 반드시 없애야 하는지는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울 종로구 교북동의 독립문에 새겨진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친일파 이완용이 썼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비(사적 101호)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청 태종이 세운 비석이다. 치욕스러운 과거를 지우려면 이런 것부터 없애야 한다.

워터게이트로 탄핵당할 위기에 놓이자 스스로 물러난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당시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기념관은 연고 지역에 지금도 남아 있다. 미국엔 전직 대통령이 남긴 글이나 글씨 등을 기록으로 남기는 전통이 있다.

세종시에 세워진 박 전 대통령의 표지석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대통령의 통치 흔적이자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전직 대통령이 남긴 흔적 중에 긍정적으로 기념할 것이 아니더라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것이라면 섣불리 없애기보다 남겨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세종시 탄생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포퓰리즘적 행태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재임 4년간 박 전 대통령의 부적절한 행위가 국민의 가슴에 남긴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실제로 헌법재판소는 지난 10일 “(박 전 대통령의) 헌법과 법률위배 행위는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옳은 과거’만 남기고 ‘잘못된 과거’는 깡그리 지워버려도 될까. 기록이 없다면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을 것이다.

김방현 내셔널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