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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보석이어야 세상도 빛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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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8면

동양학 가라사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나보다 우리, 분열보다 통합, 개인보다 ‘관시(關係)’를 강조한 말이다. 관시는 동양을 일통하는 핵심어다. 가족, 집단, 넓게는 일본의 ‘대화(大和)’, 중국의 ‘중화(中華)’, 우리의 ‘통합’까지 관시다. 문제는 오늘날 국가적 위기 역시 관시에서 비롯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니스벳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개인’과 ‘관시’로 대비했다. 먼저 미국의 초등교과서를 예로 든다. “딕이 뛰는 것을 봐라. 딕이 노는 것을 봐라. 딕이 뛰면서 노는 것을 봐라”며 개인의 행위를 주목한다. 반면 중국은 사뭇 다르다. “형이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구나. 형은 어린 동생을 사랑해. 그리고 동생도 형을 사랑한단다”며 관계에 초점을 둔다. 어린이 교과서조차 동서의 구분은 확연하다.

 우리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차이도 크다. 예를 들면, 배경과 인물을 함께 찍은 사진에서 미국인들은 배경의 변화에 둔감하고 동양인들은 인물 변화에 어둡다. 사물을 분류할 때 미국인은 규칙 중심이지만 한국인은 유사성을 따른다. 상반되는 주장에 미국인은 합리적인 쪽을 지지하지만, 중국인들은 통합적인 타협안을 찾으려 한다.

 서양은 개인, 동양은 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에도 가족과 사회는 있다. 다만 개인에 초점을 두고 공사(公私)를 구분한다. 반면 동양은 관시 안에서 개인의 자리를 찾는다.

 관시를 중시하는 동양이 더 인간답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미화된 신기루일 수 있다는 말이다. 동양에는 인격은 있지만 인권은 없고, 위아래는 있지만 평등은 없으며, 관계는 있지만 자유는 없다. 관시 앞에 자유·평등·인권은 무력하다. 아니 ‘개인’자체를 패륜(悖倫)으로 취급해왔다.

 동양에도 개인에 관심을 두고 관시의 부조리를 비판한 인물도 있었다. 사회를 인정치 않고(無君) 쾌락에 빠진 이기주의자라는 양주(楊朱)다. 이 누명은 유명 사상가를 시기한 무명 유학자의 모함이었다.

 양주는 “고기를 좋아한달 때 고기란 썩은 쥐 고기는 아닐 테고, 술을 좋아한달 때 술은 부패한 구정물이 아니듯, 삶을 소중하달 때 삶이란 죽음(未生)보다 못한 억눌린 노예의 삶인 ‘박생(迫生)’은 아닐 것이다”라 하였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全生)를 중시하며 인간을 관계 속의 노예로 가두어버리는 관시를 비판한 것이다.

 보석은 자기의 가치로 빛나기에 고귀하다. 하지만 가치를 보장받지 못하면 빛을 잃고 돌덩이가 된다. 개인이 돌덩이라면 사회는 채석장이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외치는 억지 ‘화합’이나 ‘통합’도 채석장에서 돌 깨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래서 빛나는 보석은 채석장에 분노한다.

 개인이 보석이어야 세상도 빛난다. 그렇다. 빛나는 개인들을 연결한 관시여야 찬란하다. 오늘의 보석은 컨베이어벨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서로를 꿰며 보배를 이룬다. 화해나 통합 역시 그렇다.

이호영

현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연구원. 서강대 종교학과 학사·석사. 런던대학교(S.O.A.S.) 박사. 동양학 전공. 『공자의 축구 양주의 골프』 『여자의 속사정, 남자의 겉치레』『스타워즈 파보기』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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