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통령 탄핵]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생과 정치역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첫 부녀대통령, 첫 여성 대통령의 영광에서 첫 탄핵 대통령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인생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다.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비로소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은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피살되면서 22세의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박 전 대통령은 유신 정권에서 5년간 각종 행사를 주관하면서 국정에 참여했다. 비극의 씨앗이 된 최순실씨와의 관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저격사건으로 사망하자 그해 11월 두 동생 근령ㆍ지만과 쓸쓸히 청와대를 나와 부모가 살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박정희 정부시절 깍듯이 대하던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자 박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런 염량세태(炎凉世態)는 박 전 대통령의 머릿속 깊숙한 곳에 ‘배신의 트라우마’를 새겼다. 80~90년대 은둔 시절 박 전 대통령 주변에 머물며 도와준 사람은 최순실씨 일가 말곤 없었다는게 정설이다. 이 시절부터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특수관계’가 형성됐다.
 박 전 대통령을 다시 대중앞에 세운 건 1997년 외환위기였다. 그는 국가적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그해 11월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다.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여의도에 입성한 박 전 대통령은 19대 국회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박 전 대통령이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한건 공교롭게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때였다. 그는 ‘탄핵 역풍’을 맞고 침몰 직전인 한나라당의 새 대표를 맡아 17대 총선에서 121석이라는 예상밖의 호성적을 얻어냈다. 이때부터 그는 2년 3개월 동안 한나라당을 이끌면서 국회의원 재ㆍ보선과 지방선거 등에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승리기록을 남겼다.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이 이때 생겼다.

드디어 박정희 시대의 종말이란 평가도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때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도 여당 비주류의 수장으로서 확고한 당내 입지를 유지했다. 특히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직접 반대 연설까지 하면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2011년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한나라당이 다시 위기에 몰리자 박 전 대통령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다시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김종인ㆍ이상돈 비대위원 같은 새얼굴을 영입해 19대 총선에서 예상밖의 대승을 이끌어냈다. 이를 기반으로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때 87년 개헌 이후 첫 과반 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됐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집권기간 내내 비타협적인 정치를 고수하면서 반대 세력의 저항을 불렀다. 집권초기엔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50~60%대를 유지했기 때문에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스타일이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2014년 연말 ‘정윤회 문건’ 파동이 터지면서 박 전 대통령은 위기를 만났다. 박 전 대통령 주변에 유령처럼 떠돌던 ‘비선 실세’ 얘기가 공개되면서 지지율은 30%대 초반대로 급락했다. 2015년 2월엔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박 전 대통령과 관계가 불편한 유승민 의원이 당선됐다. 이미 2014년 7ㆍ14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이 비박계 김무성 의원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원내대표마저 비박계가 차지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박 전 대통령은 공무원연금법 협상 과정에서 유 의원이 청와대 방침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압박을 가해 원내대표직에서 몰아냈다. 20대 총선 공천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과 친박계는 노골적으로 유 의원을 비롯한 비박계 제거에 나섰고, 이는 김무성 당시 대표가 공천직인을 갖고 잠적해버리는 ‘옥새파동’이라는 초유의 난장판을 초래했다. 결국 고정 지지층조차 새누리당에 등을 돌리면서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이어 2당으로 밀려나는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박 전 대통령은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의 사안에서 종전과 같은 국정운영 스타일을 고수했다. 그런 상황에서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보루였던 ‘도덕성’까지 상처를 입히면서 정권을 순식간에 붕괴상황으로 몰고 갔다.
 김정하 기자 wormhol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