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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World] 미 '영장 없는 도청' 무엇이 문제인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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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6일 미국 의회에서 '사생활 보호냐, 안보냐'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영장 없는 도청'사건에 대한 청문회가 이날부터 열린 것이지요. 도청 사건은 지난 연말 뉴욕 타임스가 미 정보기관이 테러 정보 수집을 위해 일부 시민들의 통화 내용을 도청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알려졌어요. 무엇보다 도청 과정에서 법원의 허락(영장)을 받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요. 야당과 시민단체는 정부가 불법적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반발했어요. 하지만 비밀 도청을 승인했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의 권한을 정당하게 사용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결국 청문회까지 열리게 된 것이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그 의미가 뭔지 알아볼까요.

1. 미국 정부가 왜 시민들을 도청했나요.

2001년 9.11 테러를 기억하세요? 테러범들이 뉴욕 한복판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여객기로 공격해 300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지요. 미국인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어요. 서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문제는 또다시 그런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부시 대통령은 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문제의 도청도 그때 시작됐어요. 부시 대통령은 테러 정보를 찾기 위해 국가안보국(키워드 참조)이 법원의 영장 없이 미국 내에서 도청할 수 있도록 승인했습니다. 국가안보국은 의심스러운 전화.e-메일 등을 샅샅이 추적했습니다. 주요 도청 대상은 테러 조직원들의 휴대전화에 전화번호가 등록된 사람들이었다고 해요. 이들에게 전화나 e-메일 등을 보낸 사람도 대상이 됐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지난 3년간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도청당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2. 이번 도청은 불법인가요.

서로 다른 주장이 맞서고 있어요. 먼저 불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번 도청이 미국 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수정헌법 4조는 국민을 근거 없이 체포.수색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어요. 실정법인 해외정보감시법(키워드 참조)도 국가안보국이 미국 내에서 도청할 때는 법원의 영장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요.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우선 미국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통령은 전시 최고사령관으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포괄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포괄적인 권한에 비밀 도청도 포함된다는 주장이지요.

3. 결국 자유와 안보, 두 가치가 충돌한 셈이네요.

맞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미국은 국가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어요. 사실 미국은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나라예요.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게 해 국민의 자유를 지킨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헌법에 규정한 곳도 미국이지요. 바로 삼권 분립, 그리고 견제와 균형의 원칙입니다. 국가안보를 위해 도청을 하더라도 반드시 법원의 허락을 얻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9.11이라는 사건이 많은 것을 바꿔놨어요. 국가안보라는 절박한 과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대통령, 그리고 행정부의 권한이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는 겁니다. 영장 없는 도청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벌어졌습니다.

항상 테러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미국의 현실도 무시하기는 힘들어요. 게다가 테러의 규모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커졌어요. 또 통신 수단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어 테러 정보를 미리 알아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요. 테러범은 수사기관이 행정절차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지요. 이 때문에 프랑스 같은 나라도 테러담당 수사관에게는 일반 수사관에 비해 훨씬 강력한 권한을 주고 있어요.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은 자유와 안보라는 두 가치 사이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겠지요. 대통령과 의회 사이의 균형점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청문회는 9.11 이후 4년여 만에 바로 그 균형점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입니다.

4. 이번 일로 부시 대통령이 물러날 수도 있나요.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여당인 공화당이 상하 양원 모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요. 그래도 정치적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일부 공화당 의원들까지도 정부를 비판하고 있으니까요. 이 때문에 청문회 결과에 따라서는 부시 대통령이 밀어붙여 온 '테러와의 전쟁'은 힘이 빠지고 결과적으로 세계 정세에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요. '애국법'(키워드 참조)이 도청 파문 때문에 '폐지냐, 존속이냐'의 갈림길에 놓인 것이 가장 상징적이지요.

조민근 기자

◆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NSA)=통신 감청과 암호 해독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 최대의 전자 첩보기관이에요. 직원 수만 3만8000여 명에 이르고 예산도 한 해 37억 달러나 쓴다니 중앙정보국(CIA)의 두 배가량 규모지요. 본부는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에 있습니다. 특히 NSA가 관리하는 국제적인 정보 감시망'에셜론'(echelon)이 유명해요. 120개가 넘는 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전화.e-메일.팩시밀리를 감청하고, 인터넷을 통해 특정인의 금융 및 의료기록 등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애국법(Patriot Act)=9.11 테러 사건 이후 제정된'테러저지법'의 별칭이에요. 특히 테러 방지를 위해 정보.수사기관에 광범위한 권한을 주고 있어요. 용의자를 감청하는 것은 물론 은행 거래, 도서 대출 등 개인적 기록물도 쉽게 입수할 수 있도록 했지요. 얼마 전 미국이 이 법을 근거로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을 제재해 눈길을 끌기도 했어요. 당초 4년간만 효력을 갖는 한시법으로 탄생했어요. 하지만 현재 미국 정부는 이 법을 계속 유지하자고 주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영장 없는 도청'사건의 파문이 커지면서 야당으로부터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어요.

◆ 해외정보감시법(FISA)=국가안보국이 미국 내에서 미국시민을 대상으로 감청할 경우 미리 비밀 법원인 해외정보감시법원(FISC)의 영장을 받도록 규정한 법입니다. 1978년 탄생한 이 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정부의 무차별적인 감청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비밀 법원을 통해 영장을 받게 해 수사 내용이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했지요. 국민의 인권도 보호하고 수사의 비밀도 지킬 수 있도록 한 셈입니다. '영장 없는 도청'은 이 법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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