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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2호 34면

겨우, 간신히, 가까스로

아무 절차 없이 죽은 자를 땅에 묻을 수도 있다. 그냥 소각장에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태어날 때와 달리 죽을 때는 그 형식과 절차가 복잡하다. 장례는,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적어도 사흘 동안 장례를 치른다. 고인을 알던 이들이 찾아와 문상하고 명복을 빈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시, 습, 반함, 염, 입관, 성복, 발인 등의 절차가 있었고 그 절차 하나하나가 길고 까다로웠다. 가령 염 하나만 하더라도 삼베로 주검을 싸고 끈으로 묶는데 삼베의 폭이 큰 것과 좁은 것의 구분이 있었고 가위로 잘라 가닥을 낼 때도 어떤 때는 두 가닥을 내고 어떤 때는 세 가닥을 냈다. 옷을 여밀 때는 왼쪽부터 여민 다음 오른쪽을 여몄고, 어떤 가닥은 묶지 않고 어떤 가닥은 묶었으며, 묵을 때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묶는데 매듭이 가지런하여 일직선이 되게 하였다.

이처럼 복잡하고 까다로운 형식과 예를 갖춘 후 겨우, 간신히, 가까스로 고인을 보낸다. 권력자도 부자도 유명인도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을 우리 공동체가 공동체 바깥으로, 사람 아닌 존재로 떠나보내는 일이 이토록 길고 지난하다. 장례의 형식과 절차를 통해 공동체는 그를 사람으로, 존엄하고 거룩한 존재로 대접하며 배웅하는 것 같아서 나는 눈물겨웠다.

아버지의 40곡

신세지는 걸 싫어하던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치매였다. 사고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인데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과거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 날짜와 시간까지 고집스럽게 기억하려고 했다. 그런 걸 기억하기란 젊은이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작년 가을에 담낭암 진단을 받고 입원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날마다 40곡의 노래를 2절까지 불렀다고 한다. 나로서는 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한 번도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거니와 어린 시절 자식들이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지 않던 분이어서.

참 시원하구나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께 칭찬을 받은 적이 없다. 아버지가 칭찬에 인색한 분이기도 했지만 워낙 내가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자식이었다. 이번에 아버지 병석에 계실 때 나 혼자 간병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병의 진행이 빨라 아버지는 말씀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형용사, 부사, 조사를 따라 동사와 명사도 점점 사라지고 나중엔 모음 몇 개만 남았다.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아버지는 짜증을 부렸다. 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죽과 반찬을 순서에 맞게 떠 드리는 것도, 몸을 닦아드리는 일도 어느 것 하나 나는 아버지 마음에 들게 하지 못했다. 새벽 3시쯤에 아버지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웅얼거리시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찌어찌 겨우 알아들은 내용은 목 뒤를 좀 긁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목 뒤와 등과 팔다리와 발바닥을 긁어드렸다. 아버지가 조금 큰 소리로 몇 개의 모음을 웅얼거렸는데 내 듣기로는 꼭 “참 시원하구나” 같았다.

새벽에 한바탕 고열이 지나간 후 잠시 아버지 정신이 맑고 자음 발음도 제법 또렷할 때였다.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어릴 때 많이 굶었다. 너희 할아버지가 사람만 좋지 실속이 없었다. 시절이 힘들기도 했다. 밥 때가 되면 친구나 친척 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누룽지라도 얻어먹을까 해서. 너는 절대 그러지 마라. 사람은 원래 다 귀하다. 없는 사람이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함부로 대하지 말거라. 배고픈 사람을 보거든 꼭 더운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거라.

아버지 요즘 같은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까 하는 소리다. 요즘 같은 세상에 밥 못 먹는 사람은 얼마나 더 서럽겠느냐.

아무도 없다

폴 퀸네트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확하게는 퀸네트의 아버지가 한 말이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자기와 죽음 사이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단다.”

지난 2월 25일 오전 11시 51분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이제 내가 아버지 자리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

김상득 :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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