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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경로당 재미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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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한 구립 경로당. 15평 남짓한 방안에서 노인 네 명이 부채질로 무더위를 쫓고 있었다. 경로당에 갖춰진 시설은 조리대와 전기밥솥.이불과 텔레비전 한 대가 전부다. 경로당 회원이 갈수록 줄어 요즘엔 하루 방문자가 4~5명뿐이다.

같은 날 방문한 관악구 봉천동 한 아파트 단지 안 경로당도 노인 두 명이 자리에 누워 TV를 보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아파트 관리인은 "찾아오는 노인들이 점점 줄고 있다. 경로당보다 인근 노인복지센터로 많이 가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로당은 국내에 가장 많은 노인복지시설로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 하지만 시설당 하루 평균 이용 인원은 10명도 안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노인 여가시설의 시설 기준 및 직원배치 기준을 이용인원 20인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노인 여가시설'에 해당되지도 않을 만큼 이용자가 적은 셈이다. 대다수 노인들은 경로당을 찾지 않는 이유를 "시설이 열악해 TV시청과 바둑 이외에는 소일거리가 없다"고 설명한다.

?노인들이 외면하는 경로당=2003년 3월 현재 서울시내 경로당은 모두 2천5백5개소에 달한다. 서울시 5백52개 행정동을 기준으로 하면 1개동에 평균 4~5개 경로당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서울시내 만 65세 이상 노인 2천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현재 경로당에 나가고 있다"고 대답한 노인은 전체 응답자의 29%에 불과했다. 이중 "일주일에 닷새 이상 정기적으로 이용한다"는 노인은 54%이어서 결국 전체 노인의 16%만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경로당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노인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지역노인들이 자율적으로 친목도모.취미활동.공동작업장 운영 및 각종 정보교환과 기타 여가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경로당의 설치 목적이 무색할 정도다.

보건복지부와 각 지자체는 해결책으로 2000년부터 '경로당 활성화 사업'을 추진해 왔다. 경로당을 직접 찾아가 각종 교육과 레크리에이션, 건강검진, 이.미용 서비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경로당 규모가 최소 25~30평 이상, 등록 회원수가 40~50명은 돼야 활성화 프로그램 도입이 가능하므로 10평 남짓한 다수의 경로당들은 이런 혜택을 보기 어렵다. 때문에 서울시내에서 현재 활성화 사업이 진행 중인 경로당은 3백35개소로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주민편의시설인가, 여가복지시설인가=전문가들은 경로당이 알차게 운영되지 못하는 근본 원인으로 경로당에 대한 법적인 개념이 통일돼 있지 않다는 점을 꼽는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김경혜(金京惠)선임연구위원은 "노인복지법상 경로당은 노인들을 위한 여가복지시설로 구분돼 있으나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서 경로당은 형식적으로 건설해야 하는 주민편의시설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노인복지법상 경로당은 노인들이 친목도모와 여가활동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정의돼 있다. 하지만 주택건설 기준에서는 1백가구 이상 주택단지에 6평 이상의 경로당 설치를 의무화했을 뿐 복지 프로그램 실시를 위한 환경과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따라서 1백가구 이상 주택단지가 들어설 때마다 경로당이 신설되지만 동네마다 설치되는 어린이 놀이터와 유사한 개념의 의례적인 공간 확보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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