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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어루만진 소년의 눈망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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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30면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건 소년의 눈이다. 아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세상이 왜 이리 자신에게 가혹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슬프고도 맑은 눈. ‘흑인 게이 소년’이라는, 나와는 너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토록 마음에 와 닿은 이유는 아마도 그 눈 때문일 터다. 지난 달 26일 열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역시 영화 ‘문라이트’ 속 소년의 눈빛에 최고상인 작품상을 안겼다.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한 영화 '문라이트'

‘문라이트’는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리틀, 2부는 샤이론, 3부는 블랙이라는 제목이다. 소년 샤이론(알렉스 히버트)은 작은 체구 때문에 ‘리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친구들을 피해 도망친 거리의 빈집에서 마약 거래상 후안(마허샬라 알리)을 만난다. 후안은 마약에 중독된 엄마 대신 리틀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

2부는 청소년이 된 샤이론(애슈턴 샌더스) 이야기다. 어머니의 마약 중독은 더 심해졌고, 샤이론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더 크고 악랄한 따돌림에 직면해 있다. 유일한 위안은 친구 케빈(자렐 제롬)과 그 사이 세상을 떠난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자넬 모네)뿐이다. 10여 년이 흐른 3부에서 샤이론은 ‘블랙’(트래반트 로즈)으로 불리는 마약상이 됐다. 강해지기 위해 몸을 키우고 거친 삶을 살아가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린다.

차별과 박해에 시달리는 소수자를 그린다고 해서, 절망으로 점철된 비극이나 의지로 가득 찬 투쟁기를 기대해선 안된다. 두 번째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거머쥔 젊은 천재 배리 젠킨스(38) 감독은 혹독한 사회에 굴복하거나 저항하는 주인공 대신, 굳건한 벽 앞에서 안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내면을 감각적 이미지로 그려낸다. 주인공은 내내 말이 없고, 눈부신 마이애미의 바다와 검은 하늘과 붉은 방 등 압축적인 이미지가 대신 감정을 전한다. ‘문라이트’를 “한 편의 시(詩)처럼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문라이트(Moonlight)’라는 제목은 영화의 원작이 된 희곡 제목인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에서 왔다. 마이애미 출신 극작가 타렐 앨빈 맥크래니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희곡에 젠킨스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보탰다.

영화는 내내 잔잔하고 또 어둡지만, 그래서 이 출구없는 삶에 찾아온 보석 같은 위로의 순간이 더 밝게 빛난다. 마이애미의 새파란 바다에서 후안에게 수영을 배우는 리틀의 모습, 절망으로 가득 찬 마음을 어루만져준 친구 케빈과의 짧은 데이트 장면 등은 뭉클하다. 1부에만 등장하는 후안은 슬픈 눈의 소년 샤이론에게 말해준다. 달빛 아래선 모두가 같은 색으로 빛난다고, 그런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그리고는 말한다. “어느 순간 너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거야. 그 결정을 절대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마.”

이 영화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이민자 차별과 소수자 혐오 정책을 쏟아내는 트럼프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읽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절망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샤이론의 눈빛을 통해 인간 보편의 슬픔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삶의 어떤 순간, 어떤 장소에서 소수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선 ‘삶’이라는 경험을 공유한다. 그래서 모두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문라이트’를 본 뒤, 당신에게 소년 샤이론이 그런 것처럼.”(제임스 랙스턴 촬영감독)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이 되어버릴 것 같다”고 말하던 이 소년이 더 이상 울지 않기를. 스스로 선택한 자신을 당당히 살아내며 달빛 아래 웃으며 뛰어놀 수 있기를, 마음 깊이 응원하게 된다. 이는 자주 혼란스럽고 버거운 우리의 삶에 보내는 응원이기도 하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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