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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행낭으로 VX 운반? … 나이지리아는 사람도 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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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병호 국정원장은 국회정보위원회에서 북한이 김정남 암살사건에 사용한 신경작용제 VX를 말레이시아로 들여온 수단으로 외교 행낭(diplomatic bag 혹은 diplomatic pouch)을 지목했다.

통관 특혜 받는 외교 행낭, 형태와 용도 #종이박스·배낭·컨테이너 등 다양 #빈 협약엔 “행낭 운반자까지 불가침” #처칠, 쿠바산 시가 들여올 때 활용 #북, 금괴 170개 넣어 나오다 발각도

과연 화학무기를 외교 행낭으로 들여오는 것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행낭이라는 단어 때문에 보통 가방 같은 모양을 생각하지만 외교 행낭에는 형태의 제한이 없다. 서류가방, 종이박스, 배낭, 선적용 화물 컨테이너 등 다양하다. 외교 행낭이란 표시만 하면 된다. 어떤 물품이든 담을 수 있다는 뜻이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외교 행낭을 ‘개인 용도’로 유용하게 활용했다. 영국 BBC방송은 그가 외교 행낭을 이용해 쿠바산 시가를 조달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외교 행낭이 살인사건에 쓰였다는 의심을 받는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4년 영국 경찰 이본 플레처가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관 앞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영국은 리비아 대사관 안에서 자동소총을 쏜 것으로 의심했다. 당시 범행에 사용된 무기는 외교 행낭에 담겨 영국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외교 행낭엔 물건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84년 영국 정부가 나이지리아에서 부패 혐의로 기소된 우마르 디코 전 장관의 인도를 거부하자 나이지리아는 외교 행낭을 활용했다. 그를 납치해 큰 상자에 담고 라고스행 화물선에 실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깜박하고 외교 화물이라고 표시하지 않아 영국 세관에 적발되고 말았다.

앞서 60년대에는 로마의 이집트 대사관에서 이스라엘의 이중첩자로 의심되는 모르데차이 루크를 잡아 외교 화물이라고 표시한 상자에 넣었다. 이집트행 비행기에 싣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짐꾼이 상자 안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 바람에 수송에 실패했다.

외교 행낭에 사람을 넣어 탈출시키려 한 전례를 감안하면 북한대사관에 은신 중이라고 하는 현광성 등도 이런 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은 이미 외교 행낭으로 밀수까지 한 ‘전과’가 있다. 2015년 방글라데시 주재 북한대사관의 1등 서기관은 약 140만 달러 상당의 금괴 170개를 외교 행낭에 넣어 반출하려다 체포됐다. 이듬해에는 같은 대사관의 또 다른 북한 외교관이 외교 행낭으로 100만 달러 상당의 담배와 전자기기를 빼돌리려다 들켜 추방됐다. 최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때는 최순실씨의 언니 최순득씨가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기 위해 외교 행낭을 썼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외교 행낭은 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의해 보호받는다. 협약 27조 3항은 “외교 행낭은 개봉되거나 유치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수색이나 세관 검사 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내용물 확인이 불가능하다.

김정남 암살사건에 외교 행낭이 이용됐다면 말레이시아에 반입된 VX는 위험성이 큰 물질인 만큼 누군가 직접 운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빈 협약은 외교 행낭을 옮기는 운반자의 신체도 불가침(inviolability)이며, 어떤 형태의 체포나 구금도 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28일 정례브리핑에서 정부가 발급한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는 인물이 외교용 물품이란 표시가 적힌 행낭을 갖고 있을 경우 수색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빈 협약상 해당 국가의 동의 없이 외교 행낭을 개봉하거나 강제로 압류해 보관할 수 없다”고 답했다.

외교 행낭에 운반자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반입이 가능했을 것이란 추측도 말레이시아 현지에선 나오고 있다. 100ml 이하의 액체 및 젤류는 지퍼백에 넣어 비행기에 반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VX는 극소량만으로도 살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100ml 이하 용기에 VX크림을 담아 왔어도 공항 출입국 관리 및 검역 담당자들은 몰랐을 수 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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