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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외교행낭으로 VX 반입? 수색, 검사 '불가' 최적의 수단

중앙일보

입력

말레이시아 수사당국과 국정원이 북한이 김정남 암살 사건에 사용한 신경작용제 VX를 말레이시아로 들여온 수단으로 외교행낭을 지목했다. 화학무기를 외교행낭으로 들여오는 것이 가능할까.

'빈 협약' 의해 보호...사람 넣어 빼돌리려던 나라도 #北, 이전에도 밀수 수단으로 사용하다 적발 '전과' #행낭 운반자 임시 지정도 가능...신체 불가침 보장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외교행낭(diplomatic bag 혹은 diplomatic pouch)은 1961년 체결된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의해 보호받는다. 협약 27조 3항은 “외교행낭은 개봉되거나 유치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7조 4항은 “외교행낭을 구성하는 포장물은 그 특성을 외부에서 식별할 수 있는 표지를 달아야 하며 공적인 목적으로 한 외교문서나 물품만을 넣을 수 있다”고 돼 있긴 하다. 하지만 수색이나 세관 검사 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내용물 확인이 불가능하다. 불법적 물품을 몰래 들여오기에 외교행낭이 용이한 수단이 되는 이유다.

실제 북한은 외교행낭으로 밀수를 해 외화벌이를 해온 ‘전과’도 있다. 2015년 방글라데시 주재 북한 대사관의 1등서기관은 약 140만 달러 상당의 금괴 170개를 외교 행낭에 넣어 반출하려다 체포됐다. 이듬해에는 같은 대사관의 또다른 북한 외교관이 외교행낭으로 100만 달러 상당의 담배와 전자기기를 빼돌리려다 적발돼 추방됐다. 북한 말고도 외교행낭을 코카인 등 불법 약물 거래에 사용했다고 의심받는 국가도 있고.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는 최순실의 언니 최순득이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기 위해 외교행낭을 썼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행낭이라는 단어 때문에 보통 가방 같은 모양을 생각하지만 외교 행낭에는 형태의 제한이 없다. 서류가방, 종이박스, 배낭, 선적용 화물 컨테이너 등 다양하다. 외교 행낭이란 표시만 하면 된다. 이는 어떤 물품이든 담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도 2차 세계대전 중 외교행낭을 ‘개인 용도’로 유용하게 활용했다. 영국 BBC 방송은 그가 외교행낭을 이용해 쿠바산 시가를 조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외교행낭이 살인사건에 쓰였단 의심을 받는 것도 처음은 아니다. 1984년 영국 경찰 이본 플레처가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관 앞에서 근무하던 총에 맞아 숨졌다. 리비아 대사관 안에서 자동소총을 쏜 것으로 의심됐는데, 무기는 외교행낭에 담겨 영국 밖으로 빠져나갔다.

외교 행낭엔 물건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사람을 넣은 적도 있다. 1984년 영국 정부가 나이지리아에서 부패 혐의로 기소된 우마르 디코 전 장관의 인도를 거부하자 나이지리아는 외교행낭을 활용했다. 그를 납치해 큰 상자에 담고 라고스행 화물선에 실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깜박 하고 외교 화물이라고 표시하지 않아 영국 세관에 적발되고 말았다.

앞서 60년대에는 로마의 이집트 대사관에서 이스라엘의 이중첩자로 의심되는 모르데차이 루크를 잡아 외교화물이라고 표시한 상자에 넣었다. 이집트행 비행기에 실는 데 까지는 성공했는데, 짐꾼이 상자 안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 바람에 실패했다.

김정남 암살 사건에서도 외교행낭이 이용됐다면 VX는 짐으로 부치기에는 위험성이 큰 물질인 만큼 누군가 직접 운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외교행낭을 옮기는 운반자(courier)는 각국이 임시로도 지정할 수 있다. 빈 협약은 운반자의 신체는 불가침(inviolability)이며, 어떤 형태의 체포나 구금도 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외교가 소식통은 “정부가 지정한 인물이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를 보유하고 있고 외교용 물품이라는 표시가 적힌 행낭을 갖고 있다면 전혀 수색을 받지 않는다”고 전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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