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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컬처 스토리

경제학 농담과 저출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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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소영 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부장

경제학은 자학 농담이 많다. 학생들이 졸기 시작하면 교수님들은 그런 농담으로 깨우곤 했다. 내 잠을 깨웠던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다. 어느 연구용역직에 수학자, 통계학자, 경제학자가 지원했다. 면접관이 먼저 수학자에게 물었다. “2 더하기 2는 몇인가요?” 수학자는 황당해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4죠.” 다음은 통계학자. “평균 4입니다. 오차가 발생할 수 있지만.” 다음은 경제학자. 그는 벌떡 일어나 문을 잠그고 오더니 면접관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몇을 원하는데요?”

경제학자가, 정부든 대중이든 타깃의 입맛에 맞추고자, 또는 스스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그걸 정당화하고자, 보고 싶은 데이터만 보거나 데이터 해석을 편향적으로 하는 등등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맞춤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현실에서 이런 사례는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최근에 논란이 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도 그렇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기혼자의 저출산보다 혼인율 하락이 더 큰 저출산 원인이므로 혼인율을 높여야 하며, 혼인율이 낮은 이유는 젊은이들이 스펙을 쌓느라 결혼시장에 늦게 들어오고, 고학력 고소득 여성이 자신보다 학력과 소득이 낮은 남성과 소위 ‘하향선택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보고서가 제시한 그 해결책을 보도자료에서 그대로 발췌해본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불필요한 휴학, 연수, 자격증 취득 등이 채용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지.”

“하향선택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이것을 본 친구가 말했다. “행정자치부의 ‘출산지도’에 이어서 또 한번 국가의 목적으로 사육 당하는 개돼지 되는 기분이군. 월요일엔 네 발로 출근해야 할 것 같아.”

그 친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보고서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일단 그 전제에서 사람들이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이기에 앞서서 국가경제의 자원 혹은 부속품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 연구는 전제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애덤 스미스와 그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의 초상화.

애덤 스미스와 그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의 초상화.

보고서의 여러 디테일에서도 반박이 가능하다. 우선 낮은 혼인율과 기혼자의 저출산은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다. 금전적인 것만 따져도 소득에 비해 자녀 양육 비용이 높은 한국의 현실에서, 그 비용을 포함한 결혼의 미래비용이 결혼의 미래효용보다 크기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았는지? 게다가 개인의 취미와 자기계발 등이 중요해진 반면 OECD 최장 노동시간으로 인해 잔여시간이 희소한 것을 감안하면 자녀 양육의 비용은 더더욱 높게 계산된다.

노벨경제학자 게리 베커 (Gary Becker 1930~2014)는 ‘결혼은 결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이 독신일 때 얻는 만족보다 클 것이라는 기대가 전제됐을 때 가능하다’고 했다. 이때의 만족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을 이루는 데서 얻는 안정감, 소속감과 독신으로서 누리는 독립성, 자유 등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한다. 한마디로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 비용편익분석을 해서 결혼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 숫자로 쓰진 않더라도.

고학력 고소득 여성들이 소위 ‘하향선택결혼’을 하지 않는 현상도 그런 비용편익분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맞벌이 가정이라도 여성의 가사 육아 부담이 더 크고 출산이 경력단절로 이어지기 쉬운 한국의 현실에서 고학력 고소득 여성일수록 결혼의 기회비용이 커진다. 이 경우 크나큰 사랑의 기쁨으로 효용을 증대시키는 운명의 배우자를 만나든지, 아니면 소위 좋은 스펙으로 효용을 증대시키는 배우자를 만나는 경우에만 효용이 비용을 초과해서 결혼에 이르게 된다. 물론 어느 쪽이든 쉽지 않아 독신으로 남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독신의 편익이 비용보다 크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인터넷과 SNS를 보면, 굳이 고학력 고소득이 아니더라도 자립할 수 있는 젊은 여성들은 결혼의 기회비용을 높게 보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여성의 결혼의지를 높이는 것과 관련해서는, 한국의 가정과 직장의 문화를 북유럽의 경우처럼 남녀 모두 여유를 가지고 직장일과 가사 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에 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소득 고학력 여성의 소위 ‘하향선택결혼’을 유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경제학적 연구에서 필요한 것은 가사와 육아 등 돌봄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현실에 맞게 수치화해서 정책 계산에 넣는가이다. 최근 나는 스웨덴 출신 저널리스트 카트리네 마르살이 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구입했다. 아직 읽지 않아서 경제학적으로 엄밀한지는 알 수 없지만, 서평에서 본 이 책의 화두에 끌렸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각자의 이기심이 시장 거래로 조율되는 경제 구조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독신인 그에게 저녁을 차려준 어머니 마거릿 더글라스의 노동은 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간의 경제학이 가사와 돌봄 노동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왔다는 것.

하긴 학부 시절에 교수님께 들은 경제학 농담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GDP를 당장 쉽게 대폭 늘리는 방법은 모든 가정주부들이 자기 집이 아니라 옆집에 가서 - 즉, A는 B의 집에 가고 B는 C의 집에 가고 C는 A의 집에 가서 - 자기 집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가사·육아 노동을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킬킬 웃으면서도 GDP 산출법의 한계만 생각했을 뿐, 여성의 가사 및 돌봄 노동이 객관 평가되지 않는 현실과 그것이 초래하는 큰 문제에 대해서는 그때만 해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저출산 정책이 계속 헛발질을 하는 데에는 바로 이 이유가 클 것이다. 가사와 육아 등 돌봄 노동은 '사랑의 노동'으로 아름답게 표현되면서도 정작 경제 시스템에서 그 실제적 중요성과 가치는 막연하게 다뤄지고 도리어 저평가된다. 그래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가사와 돌봄 노동이 가정 밖에서 공급될 때 가격 책정이 제대로 안 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일례로 자녀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기자 동료들도 어린이집 보육교사 급여가 너무 적다고들 한다. 그러니 교사들이 과연 의욕을 가지고 양질의 보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것이다.

경제학 농담은 대부분 뼈있는 농담들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 과학적 방법론과 인간사회에 대한 폭넓은 적용 가능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자찬하지만, 또 이런 경제학 농담들을 통해 그 맹점과 한계를 되새긴다. 경제학 농담 몇 개만 되뇌어도 저출산 정책을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문소영 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