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바이 더 씨’(원제 Manchester by the Sea, 2월 15일 개봉)는 ‘영화 같은 현실’보다 ‘사실적인 영화’라는 표현에 훨씬 가까운 작품이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인 이 작품은, 여느 영화와 달리 슬픔조차 극적으로 토해 낼 수 없는 순간순간들을 포착한다. 137분의 상영 시간이 다하도록, 삶을 무너뜨린 커다란 상처가 곧 아물고 위안이 찾아올 거라 쉽게 결론짓지 않는다. 그리하여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삶, 그 한순간을 직접 들여다본 것 같은 체험을 하게 한다. 로너건 감독을 미국의 새로운 작가 감독으로 우뚝 세운 이 영화의 남다른 연출력을 짚어 봤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깊이 읽기
죄책감에 빠져 살던 남자가 형 조(카일 챈들러)의 임종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반적인 이야기라면, 돌아온 탕아는 과거와 화해하고 상처를 회복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과거보다 나은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 온당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결론적으로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 리(케이시 애플렉)는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는 데 실패했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동화 같은 해피엔딩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듯, 영화 곳곳에 주도면밀한 브레이크 장치를 심어 놓았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이 무뚝뚝해 보이는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첫 번째 브레이크 장치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라는 공간 자체다. 이곳은 영국의 명문 축구 도시도 아니고, 미국 뉴햄프셔주(州)의 또 다른 맨체스터와도 구별된다.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이 해안 도시는 인구 1만 명도 채 안 되는 곳으로, 마을 주민의 90% 이상이 백인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다. 로너건 감독의 데뷔작 ‘유 캔 카운트 온 미’(2000) 속 배경이었던 미국의 작은 마을 스코츠빌처럼, 익숙하지만 참을 수 없이 주변과 밀접하고 어떤 면에서는 고립된 곳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익명성이 인간을 고독하게 한다면, 소도시의 시선은 누군가를 숨 막히게 하는 법이다. 리는 과거에 이곳에서 행복했고 또 엄청나게 큰 불행을 겪었다. 그런 만큼 맨체스터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고역스럽다. 곳곳에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 있고, 마을 사람 모두가 자신의 끔찍한 실수에 대해 알고 있으니 아마도 발가벗겨진 느낌일 것이다.
리 외에도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맨체스터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리의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에게는 소속된 록 밴드와 친구들이 있는 익숙한 터전이다. 리의 전처 랜디(미셸 윌리엄스)는 그 사건(!) 이후 리와 이혼했지만, 여전히 이곳에 해결해야 할 마음의 숙제가 남아 있다. 한편 과거 방탕하게 살았던 패트릭의 엄마 엘리스(그레첸 몰)에게 이 도시는, 그 자체로 숨기거나 외면하고 싶은 기억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연을 품은 맨체스터는, 누군가의 유토피아인 동시에 끔찍한 디스토피아다. 이곳에서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리가 형의 장례를 치르며 고향에 머무는 시간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리의 과거와 현재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다. 이 영화는 리의 트라우마를 탐험하듯,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을 플래시백으로 보여 준다. 그 기억은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긴 잔상으로 남기도 한다. 이렇게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다 보면, 리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그가 왜 그렇게 영혼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왜 일부러 고행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리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건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럴 틈이 없다. 슬퍼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번거로운 현실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과거가 비극이라면, 현실은 부조리한 희극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로너건 감독이 심어 놓은 두 번째 브레이크 장치다.
형이 죽은 뒤, 리는 몸도 마음도 바쁘다. 극 중에서 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다. 영안실에서 형의 시신을 확인한 날에도, 리는 평소처럼 TV를 보고 맥주를 마신다. 이후 그는 장의사를 만나고, 장례 절차에 대해 흥정하며, 변호사를 만나 유언장을 확인한다. 10대 소년 패트릭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죽은 건 슬프지만, 여전히 록 밴드 활동을 하고 여자친구와의 섹스에 의욕을 불태운다. 그렇게 그들은 나름의 삶을 이어 간다. 무엇보다 리에게 가장 골치 아픈 현실은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저히 맨체스터에서 살 수 없는 리와, 맨체스터를 떠나선 살 수 없는 패트릭. 이 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한편으로 두 사람의 삐걱대는 관계를 유머러스하게 보여 주고 있기에, 이 영화는 슬픔이 감상주의로 흐르는 걸 막는다.
리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조카의 소소한 부탁들을 들어준다. 패트릭을 생모와 만나는 자리에 데려다주는가 하면, 패트릭이 여자친구와 거사 치르는 걸 돕기 위해 여자친구의 엄마와 불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주차한 차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도 있다. 이렇게 귀찮고 번거로운 현실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리의 상실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차피 삶이란, 비극과 희극이 짓궂게 뒤엉킨 부조리한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삶은 흐른다, 맨체스터의 바다처럼
이 영화 말미에 이르면 마침내 맨체스터에도 봄이 찾아오고, 얼어붙은 땅도 녹는다. 그동안 냉동고에 보관해 두었던 조의 시신을 마침내 땅에 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례식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는 듯 보인다. 얼음이 녹듯 리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영화는 끝까지 극적인 희망으로 이야기를 봉합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가능성을 제시할 뿐, 각자가 품은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덤덤한 결말이 바로 로너건 감독의 마지막 브레이크 장치라 할 수 있다. 이쯤 되니 로너건 감독이 지독히 냉소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기승전결이 뚜렷하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리는 맨체스터에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다. 수군대며 리를 밀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맨체스터 사람들은 대부분 선의를 갖고 있다. 오래전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때도 경찰들은 “실수일 뿐”이라며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헤어진 아내 랜디는 지난날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다정한 이웃들은 이곳에서 함께 살자며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세상엔 인간관계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 있다. 리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는, 결국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로너건 감독은 “당신이 고통스러워해도 세상은 그대로 흘러간다. 때로는 아주 좋은 일과 아주 나쁜 일이 동시에 찾아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전 세계 인구 70억 명이 모두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살아가진 않는다. 겨울 뒤에 봄이 와도 또다시 겨울이 오는 것처럼, 말 없이 흘러가는 맨체스터의 바다처럼, 슬픔은 어느 순간 완결되지 않는다.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어떤 형태로든 흘러갈 뿐이다. 그 현재진행형의 오묘한 섭리를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겸허하게 보여 준다.
신민경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