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파일] 여자로 태어난 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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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일상생활에서 남자와 여자의 두드러진 차이를 화장실 사용법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영화 '천상의 소녀'(2일 개봉)는 자못 충격적이다. 영화의 배경인 탈레반 집권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는 남자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방법이 원천봉쇄돼 있다. 영화가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여자들은 집 밖에 나갈 때 얼굴과 머리를 모두 가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남편 같은 남자 보호자와 동반하지 않으면 외출 자체가 불법이다. 자연히 여자는 학교도, 직장도 다닐 수 없다. 남자의 수입만으로 호의호식할 수 있다면 모르되, 오랜 전쟁의 폐허에서 우리네 주인공처럼 여자 셋만 사는 집안이라면 생계가 막막할 지경이다. 주인공인 12세 소녀의 엄마는 그래서 딸아이의 머리를 자르고 '오사마'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시키는 모험을 감수한다. 오사마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잡화점 일을 거들면서 이제까지 전혀 모르던 남자들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천상의 소녀'는 미국의 공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자연히 탈레반의 학정에 대한 고발의 시선이 담기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 이상이다. 남장소녀 오사마가 하루하루 겪는 불안을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시대와 장소를 떠나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일례로, 같은 또래 남자아이들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 오사마에게는 뭐하나 마음 놓을 수 없는 모험의 연속으로 묘사된다. 공개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탈레반식으로 터번을 감는 것도 난생 처음이라 자칫 여자인 것이 발각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이다. 나무타기를 통해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또래들의 놀이문화 역시 오사마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그런 오사마의 심경은 관객들 자신도 이런저런 성역할의 금기에 도전하면서 조금씩 맛봤을 불안감을 자극한다.

현대 여성의 욕심대로라면 오사마가 좀 더 당당히 운명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이 소녀의 처지는 그런 기대조차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오사마는 스스로의 힘과 부랑아 소년의 도움으로 몇 차례 고비를 넘기고도 결국 여자임이 발각된다. 나이 든 남자들의 음험한 시선을 받던 고운 외모 덕에 사형은 면하지만, 그 대신 주어지는 운명 역시 가혹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남장을 했던 오사마의 조건은 이런 비극을 한결 가슴 아프게 만든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의 세디그 바르막 감독은 파키스탄으로 망명했다가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 고국에 돌아와 이 영화를 찍었다. 이렇다 할 제작기반이 남아있지 않는 형편에서 감독은 직업 배우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동냥으로 먹고 살던 소녀를 주연배우로 캐스팅해 진솔한 연기를 뽑아냈다. 영화 구경은커녕, 먹고 사는 문제도 쉽지 않은 비참한 현장에서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탄생하곤 하는 역설이 이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2003년 칸영화제.부산영화제에 소개됐고, 이듬해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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